「달과 함께 흘러가다」/ 최금진/ 『문학마당』2003년 가을호
달과 함께 흘러가다
사내는 커튼을 연다
밤의 내장이 훤히 다 보이는 창문
이 집에선 참 많이도 아팠다, 사내는
옷 가방 위에 걸터앉아 방안을 돌아다본다
고장난 싱크대의 卒卒卒, 소리 아래엔
장기알 몇 개가 고여있다
뭉치가 되어 구르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꺼칠한 음모를
사내는 흰 편지봉투에라도 담아
달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잠시 손톱을 깎으며 사내는 달을 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혼자 떠도는 것들은
모두 외통수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엑스레이 필름처럼 흰 뼈가 다 비치는
달을 가져가고 싶다
누구든 통째로 집을 들고 이사갈 수는 없다
창문을 열고 홀로 내다보던 쓸쓸한 풍경 서너 장을
겨우 스티커처럼 기억 속에 붙이고 갈 뿐이다
사내는 가방의 바깥 지퍼를 열어
창틀에 꽂힌 자신의 증명사진 한 장을 넣는다
끝이다, 문이 닫힌 빈 방은 오래도록
혈우병처럼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卒卒卒, 사내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으며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감상]
이사를 떠나 이제 곧 빈방이 될 풍경이 잔잔하게 보여집니다.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겹쳐지거나 병치되면서 '장기알'과 '물소리(卒卒卒)', '달'과 '엑스레이' 등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탁월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비유가 얼마나 詩를 詩답게 하는 힘인지 확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