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랑」/ 박수현/ 『시안』2003년 가을호, 신인 당선작 中
오래된 사랑
반달이 골목 끝을 가로막던 밤이었다. 그가 줄장미 번져 오른 담벼락으로
갑자기 나를 밀어부쳤다. 블록담의 까슬함만이 등을 파고들던 밝지도 어둡
지도 않는 첫 키스의 기억. 사랑이란 그렇게 모래 알갱이만한 까슬한 감각
을 몸속에 지니는 것. 해마다 줄장미가 벙글어 붉은 꽃을 피울 때마다 내
오랜 사랑, 작은 모래알에서 자갈이 되었다 어느 새 구르지도 못하는 억센
바위가 되었다.
물길을 내고 싶어 정으로 바위를 쳐 내렸다. 텅텅 소리를 내며 튕겨나 발
등에 남겨진 피멍, 흐린 날이면 어김없는 날궂이로 상처가 덧나곤 했다.
바람이 헛된 책장을 넘긴다. 엎드린 채 꽃보다 가시울 키우던 등위로 피가
흐른다. 검은 피가 강처럼 흐르고 내 마음 속 어디선가 쉴 새 없는 정 소리
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위. 구르며 부서지며 비로소 물길을 낸다. 짙은 가
시울로 깊어지며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들...
[감상]
첫 키스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득한 시간을, 그리고 기쁨과 슬픔의 터널을 지나야겠지요. 이 시는 그런 여정을 모래에서 자갈로, 그리고 바위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잔잔하게 일깨워줍니다. 도무지 부서질 것 같지 않은 이 각박한 일상이야말로 억센 바위가 아니겠습니까. 그 바위를 정으로 내리치듯 책을 읽으며 감성의 먼먼 모래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골목 끝 첫키스가 그렇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