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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 꺼진 숲을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고영/ 『문학과창작』2003년 8월호

        나는 불 꺼진 숲을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추분 지나 급격하게 야위는 가을밤,
        실내등 불빛 아래서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읽다가
        랭보의 무덤에 이르러 나는 밑줄을 긋는다
        밑줄 아래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자유롭게 비행하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잉크로 쓴 내 첫사랑은 유성이 되었다
        검정파랑빨랑 삼색의 잉크병을 비우면 희망도 상처로 번졌다
        책을 떠나서 가벼워진 단어들 문법들 그리고 금방이라도
        뾰르릉 날아갈 것 같은 시어들,
        유혹은 놓칠 수 없는 것들만 밤새 끌고 다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은 마약처럼 위험했다
        부도난 어음은 찢겨져 길거리에 뿌려졌다 지갑 속에서
        낯선 명함들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내 연락처엔
        야윈 발자국들만 웅성거렸다
        바람이 이끄는 길을 밟고 가기도 너무 벅찼다
        세상은, 문법이 통하지 않는 미로 같았다

        랭보의 무덤을 지나 밑줄도 끝났다
        밑줄 너머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아름다운 유성을 품고 있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저토록 눈부신 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산비둘기 날 때마다 숲은 환해졌던 것인가

        나는 불 꺼진 숲을 이제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상]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드는 시입니다. 랭보의 시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산비둘기'의 모티브도 좋고요. 가끔씩 만나고 헤어지고 나서 남는 것은 명함밖에 없어서, 나 또한 누군가의 네모란 명함에 갖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이처럼 환한 것을. 회화나무 숲 가을이면 느낄 수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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