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방석위의 생 [나희덕]

2001.09.12 13:03

석류 조회 수:70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방석 위의 생


이 방석을 어느 방석 옆에 놓을 것인가

늘 그게 문제인 사람들과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동안


방석이 방석을 밀고, 방석이 방석을 끌어 당기고,

방석이 방석에게 웃고, 방석이 방석에게 소리지르고,

방석이 방석을 밟고, 방석이 방석과 헤어지고,

다시 방석이 방석을 낳고, 방석이 방석을 낳고......


저마다 방석을 들고 기웃거리는 삶이라니!


술자리를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걷던 밤

하늘에서는 별이 별을 낳고, 별이 별을 낳고......

내 시린 입김은 얼마 날아가지 못해 공중에서 얼어 붙던 밤

어느 집 담벼락 밑에 불씨가 남아 있는 연탄재 두 장

나는 그 앞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구멍이 스물두 개나 뚫린 그 둥근 방석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