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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린더를 넘기며

2003.03.01 18:34

윤성택 조회 수:206



캘린더를 한 장 넘겼습니다,
나를 앞서간 몇몇 약속들이
3월의 숫자 밑에 메모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래를 결정짓고 있다는 것인데
왜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까요.
약속으로 이뤄진 미래가 혹시
내 인생 전부가 아닐까.
약속대로 사랑을 하고 약속대로 행복하고
그렇게 나는 약속을 지키다가 늙어갈 것은 아닌지.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이 약속이라면
나는 가늘고 긴 희망이라는 낚시줄을
미래에 휙 던져놓고 그 줄이 물고 온 사건과 인연을
당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망이란 그렇게 배반된 약속에 대한 탄식이며
슬픔이란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에 대한 연민이라고.

짧은 2월이 약속을 지키다가 그렇게 갔습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 그 어딘가
만나고 싶은 사람,
그 어떤 우연이라도
우주의 질서에 의한 약속 수순이면 어쩔 것인가.

그래서 둘 다 약속을 해놓고
둘 다 잊어버린 시간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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