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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실에서 권투를 하다

2004.12.19 17:16

생은다른곳에 조회 수:182 추천:1

기관실에서 권투를 하다

생은다른곳에


처음이 중요해
바람 불고 파도치는 험준한 날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않는
처음이 중요해

TV를 보다가
삿대질하며 둘러앉은 신사들을 보다가
좌판 위 가위질하는 엿장수를 보다가
거울 속 검게 그을린 내 자신을 보다가
틈만 나면 각혈하는 기관실에서
박동하는 불덩어리 부둥켜안은 채
삶은 왜 한없는 저 밑바닥을 닦게 하는 것일까

취사장을 지나다 힐끔 힐끔 보았어
먹다 남은 생선 두 마리 수채 구멍에 걸린 채
등이 곪아 계류하지 못하는 노부부처럼
언제나 뱉어 놓은 생의 이면은
감추고 감추어도 추했었잖아

물보라 휘감고 도는 갑판 위에서
연돌 같이 기침하는 몸부림이 중요해
언제나 펼쳐보면 보이지 않던
시작도 끝도 없는 망망대해에
살아생전 죄짓지 않고 떠 있는 것만이
멀미 같은 이 세상에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을 잃지 않고 떠 있는 게 중요해

21세기 주상복합 오리엔탈 건물들이
산동네를 유행처럼 밀어 올릴 때
21년 근속 노동의 결과가 한달 81만원인 노동자는 목매달게 하는*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뤄냈다고 떠들어대는
나라
걷어차고 싶은 것이지
뱉어내고 싶은 것이지
줄달음쳐 뛰어들어 막아내고 싶은 것이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고통의 문전으로
포승줄에 등 떠밀리 듯 내몰린다면
도대체 우리들의 마지막 라운드는 어디쯤에 있는 것이냐!

그래서 말이지
처음이 중요해
정신을 잃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서 있는 게 중요해


* 한진중공업 지회장 고 김주익씨의 삼가고인의 명복을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