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앞둔 <문청>에게
며칠 밤을 꼬박 새웠겠구나. 며칠 전부터 전화도 받지 않는 걸 보면 올해에는 <목숨>을 건 모양이다. 졸업장을 받아들기 전에 등단하고 싶어하는 그 심사를 어찌 모르겠느냐. 두 눈에는 핏발이 서고, 신경은 마취실 앞에서 대기하는 환자처럼 날카롭겠구나. 이윽고 겉봉투에 신문사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 뒤 우체국을 나설 때, 그때만큼은, 세상이 만만해 보일 것이다. 네가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질 것이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문학청년>들에게 11월은 잔인한 달이다. 신춘문예병! 한두 번 투고해 당선되는 행운아들에게 신춘문예병은 달콤한 성장통이지만, 투고 횟수가 서너 번 넘어가면 오만은 자학으로, 자학은 눈꼴시린 <포즈>(얼치기 문학청년의 치기 정도로 통용되던 이 말도 참 오랜만에 써본다)로 변한다. 이 고질병의 유일한 처방전은 데뷔이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신춘문예(경향신문은 <신인작가상>으로 명칭을 바꾸었음)나 문예지 공모, 대학 문학상, 백일장 등에 투고된 시를 심사해왔다. 그러니까 매년 수천 편의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시>를 읽어온 것인데, 그때마다 최초의 독자라는 설렘보다는, 최초의 작품을 폐기처분하는 최후의 독자라는 안타까움이 훨씬 더 컸다. 응모작의 수준은 평균적이었고, 지난 몇 년 사이 평균점수는 꽤 상승했지만, 신인다운 작품은 만나기 힘들었다. 패기만만한 작품이 없었다. 거친 목소리가 없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시를 돌아보면, 시인 지망생들의 <조로 현상>만을 탓할 수도 없겠다. 너도 잘 알다시피, 요즘 한국 시는 분노하지 않는다. 한국 시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커 보인다. 한국 시는 세계화로 압축되는 <거대 담론>을 배제하고 있다. 세계화가 개별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뿌리를 뽑고 있는데도, 한국 시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다. 거칠게 말해, 한국 시의 장르는 하나이고, 그 장르를 움직이는 엔진 역시 하나다. 한국시는 곧 서정시이고, 서정시의 창작론은 의인화이다. 나는, 네가 의인화를 붙잡고, 식물성 이미지를 구사해, 잘 쓰여진 서정시 목록을 하나 늘리는 경우라면, 네가 5개 일간지 신춘문예를 석권한다 해도 시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거칠게 말하자. 시인은 세 부류다. 우선, 자기가 쓸 수 있는 시만 쓰는 시인. 둘째, 자기가 쓰고 싶은 시만 쓰는 시인. 셋째, 자기가 써야 할 시를 쓰는 시인.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자기 재능과 권리에 충실한 시인들. 나 역시 아직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시인이 될 너와 더불어 세 번째 시인이 되고 싶다. 우리에겐 써야 할 시가 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저 <보이지 않는 손>들의 정체를 밝히는 시, 다시말해 우리의 분노에서 촉발되는 시 말이다(20여 년 전, 귀에 못을 박던 소리!).
우리, 우리가 써야 할 시에서 만나자, 우리 자신의 분노에서 만나자.
〈시인 이문재〉 경향신문 2005년 12월 0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