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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터 주던 알람소리

2009.11.04 13:49

윤성택 조회 수:513 추천:14


어둠을 터 주던 알람소리

시간은 일생의 순간순간을 기로로 만들면서 한 방향을 선택하게 만든다. 독서는 그런 선택에 있어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한다. 내가 그 혜안을 지녔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부단히 이 길을 걸어왔다고 할까. 돌이켜 보건데 책은 인생을 떠올릴 때마다 늘 함께 있었다. 내가 자란 곳은 충남 보령이었다. 어렸을 적 방학이 되면 어떤 이끌림처럼 서울 이모댁에 가곤했다. 이모부가 종로에서 서적도매상을 하고 계셨고, 그래서인지 그 집에는 책이 참으로 많았다. 그 책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방학숙제도 까맣게 잊곤 했다.  

        1.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세계명작동화전집 한 질을 깔고 앉아 존다
        기차의 등받이로 삶은 계란 껍질이 부서진다
        그늘이 반쯤 베어 먹은 객차는 더위로 텁텁하다  
        자면 안 돼 홍성 광천 다음엔 대천이야
        내려야할 역은 다가오는데 선풍기 바람은
        잠을 휘휘 감고 터널을 꿀꺽 삼킨다

        명작전집은 내 몸 근수를 쟀다 놓는다
        몇 번씩 대낮 광장이 접시저울처럼 요동친다
        너무 무거워 손바닥에 그어진 붉은 줄,
        양장본에 끼워 펼쳐본다 나는 그 갈피를 걸어
        터번을 두르고 양탄자에 올라 빨간 구두를 신었으나
        탐구생활 빈 칸에서 엄마와 마주친다
        나는 보름치 일기를 하룻밤에 들려준다

                        - 시집 《리트머스》, 「추억에 들르다」 中

그 책들로 인해 내 유년은 모험과 상상으로 즐거웠다. 소포로 받기도 하고, 한 질씩 무거운 책을 혼자서 낑낑대며 가져온 애착이 더욱 책읽기를 부추겼다. 저녁마다 아라비안나이트가 계속되었다. 꿈은 지붕 위를 날아 낯설고 신기한 공간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으며 책속의 주인공들과 만났다. 책을 읽을 때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책은 그 자체로 사색이었으며, 또 하나의 우정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일기장은 점차 일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 안의 소리를 받아 적고 있었던 것이다. 일기장은 습작노트가 되어갔다. 중학교 2학년 처음 詩라는 장르와 비슷한 글을 써놓고 밤새 흐뭇해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지금의 나를 수신해두었는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당시 임박한 미래의 방향성이 지금의 나로 향했기 때문이다.
군에 입대해서는 전방의 부대로 배치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사단 군수처 행정병이 되었다. 청춘은 지루했고 갑갑함이 암구호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복도에서 바람에 섞인 화장품 냄새를 맡았다. 복도 끝 민심처 부서의 여군하사관들이었다. 나는 용감해졌다. 그곳을 기웃거리다가 그녀들과 아는 사이가 되었다. 아니 그녀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벽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빌려보면서였다. ‘샘터’, ‘월간 에세이’ 등 군대에 배달되는 잡지가 연도와 월별로 그야말로 각 잡고 꽂혀 있었던 것이다. 책들은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시사 등 삶의 진정성에 관한 내용들로 충만했다. 나는 그 후로 일 년 동안 연애처럼 그곳의 책들을 읽어갔다. 일과 후 혼자서 웃기도 눈물짓기도 하면서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나의 습작은 계속되었고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의 전공에 대해 고민하였다. 결국 제대 후 나는 문예창작과로 대학을 옮겼다.  

누군가로부터 새벽 라디오에서 내 졸시를 들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일기장에 메모를 했노라고 조금은 쓸쓸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시가 그렇게 읽혀진다는 것,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고 한편으론 무거운 일이기도 하여, 새삼 내 삶은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나는 시인이, 그렇게 되고 싶은 시인이 되었다. 군 제대 후 내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과 아버지의 눈물, 골방 원고지를 누르고 있던 압정, 몸살 끝에 혼자 마신 수돗물, 고향에 돌아가 보여줄 희망도 없이 뒷머리만 긁적이던 그것들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 돌아와 친구들과 잔을 기울일 때, 집 지하실 구석에 쌓아둔 이삿짐 박스에서 알람시계는 사흘을 넘게 울고 있었다. 나를 깨우고 아침을 알리던 알람이 새끼고양이처럼 가르랑 가르랑 혼자 울고 있었던 것이다. 건전지도 다 닳아갈 터인데 지독하게 죽지도 않고 지독하게. 어쩌면 내가 시를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지하실 어둠을 터 주던 알람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하나 둘씩 쌓여간다. 그것들이 내게 두려운 것은 아닐 테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 기억들이 내가 그렇게 되뇌던 마음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내 좌표는 여기까지다.
- 산문 「좌표」 中

시를 쓰면서 읽었던 책들이 있다. 첫째는 시인들의 시집이다. 시집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총체가 축척된 지표이다. 시대를 읽어낼 줄 알아야 진정 내가 보인다. 습작시절 틈틈이 한 권씩 시집을 정독했던 기억이다. 한 편 한 편마다 이 시가 왜 좋은지 그렇지 아니한지 꼼꼼히 메모를 해둔다. 그리고 시집의 맨 앞 장에 그 시집에 대한 총평을 적어넣는다. 다 읽은 후에는 읽은 순으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무엇보다도 책은 사서 소장해야 한다. 시집을 구매하는 것은 시집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사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른 후 책꽂이의 책은 무력한 몸을 일깨우는 영혼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철학책이다. 뻔한 얘기지만 문학을 하려고 한다면 철학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직관은 나름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아니다. 지성이 발달한 만큼 고전철학은 이미 상식으로 채워졌다. 다른 영역과 접맥된 철학일수록 사유의 진전이 수월하다. 단편적인 실용지식이 아닌 문학에 응용 가능한 자크 데리다, 펠릭스 가타리, 장 보드리야르, 폴 비릴리오,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책들이 읽을 만하다. 그 중 폴 비릴리오, 《소멸의 미학》, 《시각 저 너머의 예술》이 최근에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책 읽기를 통해 어떠한 에너지도 얻지 못했다면 그 공들인 독서는 죽은 시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활자로 씌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사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는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해석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그 시선이 투영되어야 한다. 그 믿음이 나를 견디게 하고 변화를 이끈다. 그렇게 책은 여행처럼 매혹의 발견이다.



윤성택 시인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리트머스》


* 2009년《문학사상》1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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