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닐 봉지들의 도시」/ 문성해/ 《문학마당》2003년 겨울호
검은 비닐 봉지들의 도시
1
지푸라기들이 하찮은 시대는 지났다
검은 비닐봉지들이 거리에 휘날리는 지금은,
무엇이든 버려질 수 있다는 시대다
무언가를 담은 채 발견되는 그들은
외투를 뒤집어쓴 부랑자처럼 뒤돌아보게 한다
검은 몸피 속을 더욱 궁금하게 하는 불룩한 뱃속에
반쯤 썩은 고양이와 음식 쓰레기들과
세상에서 가장 물컹하고 가장 불결한 어떤 것을 품고는
물끄러미 앉아 있을 검은 비닐봉지들
그들은 시대와 손잡은 공범임에 틀림없다
구겨진 물개 가죽처럼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놈,
차도 한가운데로 무법자인양 뛰어든 놈,
시장 아낙들 전대 곁에 시덥잖게 매달렸다가 꽃게라도 품으면 무기가 되는 놈
그 검은 아가리 속에서 죽은 태아조차 이름을 잃고 썩어간다
전봇대 아래 우두망찰 앉아 있는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그 물을 찍어먹는 생쥐 눈알이 더욱 반들거리는 저녁
아낙들이 손에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아파트로 들어선다
2
그 한결같이 번들거리는 검은 얼굴들에게
표정을 찾아 준 무명 작가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뒤틀린 표정의 석고 위로 씌워진 검은 비닐봉지들
그들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과연 그런 얼굴이었을까
검은 비닐봉지들이 아득히 하늘을 날고 있다
거리의 가장 후미진 곳을 질척이던 그들이
생선 비린내와 흙부스러기를 날리며 바람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다
날다가 덜컥, 나뭇가지에 걸리면 마른 잎새 흉내를 내기도 하고
대담한 놈들은 검은 꽃을 피우기도 한다
더 이상 무언가를 담지 않아도 될 구겨진 허파 속으로
이제는 바람이 고개를 디밀고 들어선다
[감상]
검은 비닐봉지가 시대를 말해줄 줄은 몰랐습니다. 세밀한 관찰과 묘사, 2 부분에서의 작가작품까지 어눌하면서도 핵심을 관통하는 흐름이 인상적입니다. 검은 비닐봉지의 속이 보이지 않듯 우리는 그 비밀스런 검은색에 生을 한 조각씩 숨겨왔다가, 또 그 속에 무언가를 담아 버릴 것입니다. 사실 검은 비닐봉지만 보면 무언가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싱크대 서랍에 그득히 모아둔 그것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냄새와 찌꺼기들을, 종량제 봉투 속 물컹거리는 검은 내장으로 채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