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소멸>>- 플라스틱 플라워/ 박제영/ 문학과경계사(근간)
푸르른 소멸·59 - 모월모일
모월모일 날씨 우울 시베리아를 건너온 북서풍이 골목을 휘돌아 나가고
있음, 이렇게 시작하자, 몇 건의 계약이 취소되고 직원 월급을 위해 은행
대출계에 다녀온 이야기는 빼버리자, 다음 달이면 회사 문을 닫을 수 있
다는 말도 진부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퇴근했고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
집에 돌아왔다고, 저 풍경들, 가령 말들이 매립된 헌책방, 시간들이 파업
중인 시계방, 구두가게의 저, 길 위에서 닳지 못하고 세월 속에서 낡아진
구두들, 그리하여 좌판 너머 풍화되고 있는 표정들만 지나면, 그래 저 골
목길만 지나면 거기 나의 집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기록하자, 生이
휘발되었다는 불길한 이야기는 쓰지 말자
모월모일 영구차 한 대가 시장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감상]
시적 화자의 위치가 인상적인 시입니다. 2연이 있음으로 해서 1연의 진술은 한 사내가 중얼거리는 넋두리라기보다는, 모골이 송연할 죽은 자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생각이 있다면 어떤 느낌을 들까요. 세상사 고만고만한 풍경들이 어쩌면 '부질없음'으로 귀착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월모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운명적인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