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독서2 - 이동호

2004.02.09 16:11

윤성택 조회 수:1315 추천:191

「독서2」 / 이동호/ 문학세계사,《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中



        독서 2

                ― 긴 직유(直喩)로 읽는 풍경


        오늘밤은 우물 속만큼 고요하다
        나는 책상 위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은 창 밖 세상을 읽는다
        관 뚜껑을 열 듯 창문을 쬐금 열어두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서 오랜만에 바라보는
        '낯선 세상에서'라고 발문해도 좋을 어둠 속에는,
        가로등이 하나둘 외로움을 써놓고 있다
        낙엽들은 공중을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가로등이 만들어놓은 담벼락 그림자 위에 걸터앉아,
        바스락바스락 낡은 생애를 속삭인다
        나는 단풍잎처럼 창을 붉힌다
        차 불빛이 빠르게 언덕을 날아올라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둘 박아놓고 지나갈 때에는
        언덕 너머 오래된 아파트를 읽을 수 있다
        아파트는 아랫동네를 공부하듯 펼쳐놓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중이다
        아랫마을은 교회 첨탑 군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십자가에 젖은 눈을 말리고 있다
        사람들은 우물 속 누군가가 빠뜨리고 간 낯선 표정으로,
        공원의 아기천사가 안고 있는 항아리에서 빗나가
        분수에 빠진 백동화 같은 자신의 불운을
        부끄럽게 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야경을 주렁주렁 매달고 뻗은 비포장 길을 읽는다
        길은 좁은 골목 사이로 늘어선 집들의 아킬레스건을
        요철요철 건드리며 다음 페이지 같은
        가풀막을 숨가쁘게 넘는다



[감상]
이 시는 '보는 것'을 '읽는 것'으로 바꿔 창밖 세상을 거대한 독서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이렇게 주제적인 틀이 '독서'가 됨으로써, 밤 풍경은 상식적이지 않은 새로운 읽을거리로 탈바꿈됩니다. 그래서 이 시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낯익은 것을 어떻게 낯설게 재배치 했는가를 염두 하면서 읽으면 될 듯 싶습니다. 시적 대상을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되게 하기, 참 신나는 상상력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71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최갑수 2004.02.14 1687 219
570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2004.02.12 1486 189
569 홀로코스트 - 배용제 [2] 2004.02.10 1273 195
» 독서2 - 이동호 [2] 2004.02.09 1315 191
567 한밤중의 택시 운전사 - 서동욱 [1] 2004.02.06 1202 212
566 나는 파이프다 - 오자성 [16] 2004.02.05 1424 185
565 무릎에 심은 나무 - 정재학 [1] 2004.02.03 1291 194
564 웅덩이 - 이정록 2004.02.02 1313 167
563 모월모일 - 박제영 [1] 2004.01.30 1296 184
562 저수지 속으로 난 길 - 천수호 2004.01.28 1213 189
561 달의 다리 - 천수이 [1] 2004.01.26 1166 175
560 고등어 파는 사내 - 손순미 [1] 2004.01.20 1188 187
559 캣츠 - 전기철 [1] 2004.01.19 1125 182
558 폭설 - 장인수 [2] 2004.01.17 1323 183
557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2004.01.16 1278 173
556 목공소 - 고경숙 [1] 2004.01.15 1057 184
555 상처가 부르는 사람 - 길상호 [1] 2004.01.14 1279 175
554 검은 비닐 봉지들의 도시 - 문성해 [3] 2004.01.13 1296 179
553 홍예 - 위선환 2004.01.12 1129 223
552 안온한 쓸쓸함에 대하여 - 정주연 2004.01.10 1310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