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이프다」/ 오자성/ ≪현대시≫ 2월호
나는 파이프다
내 사랑, 게릴라처럼 파이프를 타고 와서
파이프를 타고 새벽에 달아났네
지하철처럼 시끄럽고 길고 어두운 파이프
플랫폼처럼 잠시 환히 밝혀진 몸통
내 몸은 파이프의 집합
얼굴은 파이프 구멍들이 많이 박혀 있네
무언가 담고 싶고 또
짜고 싶은 구멍들, 살의 통로들
몸은 하얀 치약처럼 사랑을 짜 놓고
우그러들었네
지하철 속으로 어이없이 떠밀려온 갈색 봄나비
또 긴 파이프 속으로 놀란 듯 떠밀려가는 그 눈
내가 걸어온 긴 우주의 파이프
나는 뜨겁고 터질 듯 한 파이프를 들고 달려갔지
식혀달라고, 압축 공기를 빼달라고 졸라댔지
神의 이름으로 공갈치고 협박했지
이제는 금지된 선을 넘을 수 있는 나이
파이프에 녹이 슬기 시작하네
치과 의사가 구취 나는 입을 한번 벌리더니
이것 저것 견적을 400만원이나 뽑아내네
송유관 파이프 구멍 내고 기름 빼가는 도둑처럼
나는 파이프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네
무거운, 내려놓을 수 없는, 헐떡거리는 파이프들
이제 무조건 파이프만 끼려고 하지 않는다네
골목, 길들은 파이프로 된 몸
그 끝마다 구멍이 달려 있고, 사람들이
쥐처럼 분주한 눈을 반짝이며 들락거리네, 게릴라처럼
파이프를 타고 불안한 예감에 빠진 눈들이 문득 서네
길은 길고 어둡고 시끄러운 파이프, 밤,
몸 속에 귀여운 애인처럼 치명적으로 박혀 있네
[감상]
집요한 파이프 찾기, 그리고 그 끝에서 느껴지는 후련한 상상력의 해갈. 직유의 팽창은 명쾌한 랩송 같습니다. 게릴라처럼, 도둑처럼, 애인처럼……. 분방한 상상력은 의식의 첨예한 비유 끝에서 스파크를 내듯 빛을 발합니다. 시에 있어 개성이란 이렇듯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목소리이겠지요. 치열한 수많은 파이프가 이 시에 잇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