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이정록/ ≪문학사상≫ 2004년 2월호
웅덩이
바람이 거세어지자, 자장면
빈 그릇을 감싸고 있던 신문지 한 장이
골목 끝으로 굴러간다, 구겨지는 대로
제 모서리를 손발로 삼고 재빠르게 기어간다
웅덩이에 빠져 몸이 다 젖어버리자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바닥에 붙인다
스미는 것의 저 아름다운 안착
하지만 수도 없이 바퀴에 치일 웅덩이는
흙탕물을 끌고 자꾸만 제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먼 반대편으로 뚫고 나가려는 웅덩이에게
흙먼지와 신문지가 달려가고
하늘이 파스처럼 달라붙는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손발을 끄집어내어
허방을 짚고 나올 때까지, 삶이란 스스로
흙먼지가 되고 신문지가 되어 굴러가야만 하는 것을,
하늘의 눈은 왜 지상에 박혀있나
흙먼지를 밀치고, 파르르
제 몸을 들여다보고 있다
[감상]
바람 부는 날, 신문지 한 장을 이렇게도 보는구나 싶은 시입니다. 또 우리는 흙먼지나 신문지처럼 바람에 떠밀려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일깨워주고요. 이렇듯 사물에게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상상력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