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안식 하는 날>/ 최명란/ 《현대문학》2006년 4월호
점안식 하는 날
춘천시 의암호 근처 그 어디쯤을 지나다가
장승을 빚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났던 것이다
사내는 마무리 칼질을 하기 위해 장승의 눈자위를 다듬고 있었는데
마침 점안식 하는 날이라고 한다
장승을 두고 점안식 한다는 말은 금시초문
얼씨구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는 길이다 싶어 작정하고 지켜보는 나에게
점안식이란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며
사내는 마당에 장승들을 쭉 둘러 눕혀놓고
툭 불거진 눈자위에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넣었는데
막 점안이 끝난 장승들이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덥석 내 손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엉겁결에 잡아버린 까칠하고 뜨듯한 장승의 손에서
생명의 온기가 순식간에 내 이십만 리 혈관을 타고 좌르르 흘러
그때 나도 영락없이 한 사람 장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장승들을 따라 이리저리 마당으로 문간으로 춤추듯 돌아다니다가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한바탕 웃고 떠돌며 놀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당신을 생각하다가
점안은 정작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눈을 뜨지 못한 장승처럼 살아오던 내가 당신 곁에 누워
한평생 점안식 하는 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툭툭 불거진 내 증오와 죽음의 눈자위에
장승의 손이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 나를 점안해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감상]
성찰은 시에 있어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한 긍정적 사유인 셈이지요. 이 시는 산문적 전개에도 불구하고 상상력과 직관이 적절히 맞물려지면서 시적승화가 깊이 있게 이뤄집니다. 점안식의 <눈자위에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넣>는 행위가 결국 <점안은 정작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으로 바뀌는 순간, 시적 대상뿐이었던 <장승>은 주체적인 지위로 생동합니다. 또 이렇게 반전된 관계는 나와 대상의 <삶>의 의미로 긴장됩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은 자신을 <눈을 뜨지 못한 장승>으로 감각하는 남다른 분석과 논리이겠지요. 이런 류의 시가 아포리즘적 포즈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만한 진솔함이라면 누구든 손이 따뜻해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