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서 우리가 어깨동무를 한 사람들 속에는 이렇게 쓴 자들도 있었다.
한때 나는 건너왔다가 건너가는
이별의 것들만 가슴에 세웠다
그 떨림,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땅 깊은 곳으로 뿌리내렸다
내 둥근 여백의 벽보 숫자들
나로 인해 기억된다면
편지함 같은 변압기로
골목마다 환한 사연을 전해주고 싶었다
-윤성택, <사월 초파일> 일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것처럼 시간이 되는 사진
습관은 기억을 추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게
가장 먼저 도착하는 소리
첫페이지의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나이테의 공식에 가두지마
위태로움의 배경은 순간이 타당하다
너는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율동
가장 먼저 껍질을 깨는 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오류를 가정한다
- 안시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들과 너무 많이 마셨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마지막 한 잔을 기대하고 있을 때가 새벽 다섯 시였고 금요일 아침이었으므로 주5일제의 축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술자리는 기대할 수 없었다. 어떤 자가 말하길, 일단 출근을 해서 하루를 버틴 뒤 오늘 저녁 퇴근 후 다시 만나 하루 종일 얼마나 괴로웠으며 얼마나 지혜롭게, 또는 처연하게 고통에 대처하였는지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하였으나 동의하지 않는 자도 없었다. 물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확인하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자신의 혀가 자신의 고막에 대고 떠든 소리여서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그 제안을 듣지 못했는지 모른다. 처연하게 우리는 이별에 대처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곧장 회사로 출근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받쳐 들고 있기엔 도시의 하늘이 너무 무거웠고 땅은 너무 물렀다. 결국 늪이 나를 삼켰다. 그 긴박함 속에서도 회사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거짓말을 꾸며낼 수 있을 만큼 내가 문장과 습관에 단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악몽일지라도 세상에 가장 거대한 악어를 조롱할 수 있다.
악어의 배를 가르고 다시 빛을 삼켰을 땐 해거름 무렵이었다. 약속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종합비타민 알약 하나를 삼킨 뒤 무스크 향이 나는 로션을 두텁게 발랐다. 면도는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시인들 사이에 불문율이었다. 출근하지 않았다는 고백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니 탄탄한 구조를 지닌 새로운 거짓말들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러느라 내가 뭘 삼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18가지의 한약 성분이 첨가되어 있다는 치약은 위장병에도 좋지 않을까. 그래도 지난밤이 부끄러워 선글라스를 쓴 채 시내버스에 올랐다. 오래된 치즈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비집고 창가에 섰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빈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그것을 탐내지 않았더니 어떤 여자가 그것을 차지하고 앉는다.
그것은 김광석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옳다. 그를 듣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친한 친구의 죽음에도 WTO가 건강한 삶을 위해 규정한 1일 눈물 권장량을 엄격하게 지킨 사람이다. 그리고 새벽에 보낸 문자메시지 한 통도 비극에 충분히 이바지했을 것이다. 열 번 넘게 거절을 당했으면서도 그보다도 더 많은 날들을 취한 나는 낡은 직유로 프러포즈를 했으니. 그래도 그녀가 내 주위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까닭은 내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는 곳에 안전하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 시집을 가방에서 꺼내어 펼칠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이런 시부터 읽으리라는 기대보다도 훨씬 일찍 나는 그 시를 읽었다. 물론 추악한 구혼자를 매몰차게 내치지 않을 만큼 현명한 그녀도 그 시는 잘 알고 있다. 왜냐면 그녀라는 암호를 풀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이 그 시집이었으므로.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들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 두겠다던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 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돌아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 번 없는 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김중식, <食堂에 딸린 房 한 칸> 일부
그리고 그녀가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이어질 문장들도 기억한다. 하지만 그런 기억조차 전혀 소용없었으니 나의 눈물은 어쩌면 그녀가 속옷을 갈아입고 왔을 이불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메뚜기 떼처럼 요란하게 다가오는 소나기 소리에 놀라 마당에 펼쳐 놓은 고추들을 맨발로 걷어 들이던 내 어머니처럼 그녀도 급히 책을 가짜가 분명한 명품 가방 속으로 거둬들이더니 하늘을 원망하듯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는데, 내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할 선글라스는 어디로 갔으며, 내가 즐기고 있던 어둠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지독한 근시인 내가 안경 없이 어떻게 그 문장을 읽을 수 있었으며,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어떻게 다시 장님이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둠 속에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과했고 문 열리는 소리를 따라 황급히 시내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저녁에 만나기로 했을 법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차안에서 안경을 잃어 버려서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결코 이해될 수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가 소리쳤다.
“술 마신 거니? 도대체 지금이 몇 신인 줄이나 아는 거야? 전화벨소리에 아내와 아이까지 깼단 말이야.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재웠는데. 저 울음소리를 다시 수면 아래 파묻으려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 내일 출근 안 할 거야? 오늘은 주5일제의 축복을 받지 못한 금요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의 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기도 한 것 같다.
"김솔兄께, 바퀴벌레는 대가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다. 아홉 날을 더 살다 굶어 죽는다. 이천일년 여름 이윤학"
구멍은 바퀴다/ 바퀴 속 검은 벌레가/ 구멍을 굴리고 있다/ 아무리 강력한 살충제에도/ 벌레는 공허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채굴에 대한 벌레의 개인사가/ 뜨거운 어둠을 쉴 새 없이 옮긴 / 사십억 년 지구의 역사이다/ 구멍의 반대편/ 바퀴의 다른 쪽에서/ 눈 한 번 감지 않고 감시하는/ 윤회의 둥근 거울 때문에/ 매일 밤 촛불 심지 아래/ 인간의 텅 빈 육신 아래까지/ 파내려 갔다 되돌아오던/ 한 인간이 오늘 아침 끝내/ 침대에서 벌레로 깨어나/ 살충제 섞인 음식을 먹는다/ 나른한 현기증 혹은/ 굴욕적 포만감
-김솔, <바퀴벌레를 추모함-이윤학 시인에게> 전문
2007.10. 26 김솔
**************
제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리려다가 시를 빌려 쓴 시인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이곳 지면을 빌립니다. 여기에 글 쓴지가 너무 오래되었나 봐요. ID와 비밀번호를 찾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술 때문에 죽겠습니다....^^
삶과 의식의 공간이 이처럼 가깝구나. 삶인듯 소설인듯 시간은 매번 정도를 허락하지 않곤 하지. 가을비가 휘청휘청 걸어 나가는 새벽, 불빛은 어느 해인가에서 인화해온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밤새 묻은 잠을 털어내다 다들 길 위에 섰을 때 이별은 늘 아쉽구나. 몸도 건강해야 전어의 계절이란다. 떠났던 여자도 돌아오는 가을 전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