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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 김승봉 시인 / 《문학세계》 2009년 11월호

― 윤성택의 「아틀란티스」


바다 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당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오늘은
차갑게 수장된 심해가 그리운 날이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린다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하여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기억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더 많은 내용들이 기억으로 떠올릴 수 없는 무의식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경험한 수많은 기억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때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심각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게도 하고, 때로는 놀라운 예지(叡智)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바로 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 아틀란티스가 존재한다.
   아틀란티스(그리스어: 아틀라스의 딸)는 플라톤의 저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언급된 전설상의 섬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앞에 위치한 해상 국가로, 솔론 시대에서 9,000년 전에 혹은 약 기원전 9,600년경에 서유럽과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정복했다고 한다. 아테네 침공이 실패한 뒤 아틀란티스는 하룻밤 사이 재난으로 대양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버렸거나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는 아틀란티스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많은 문학작품들과 영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인간의 모든 노력들도 어쩌면 그들 자신의 내면에 깊이 잠겨 있는, 그러나 끌어올릴 수 없는 기억들에 대한 그리움의 편린들은 아닐까 싶다.
   화자는 불현듯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기억의 유적들, 잡을 수 없는 인간의 그리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먼저 화자는 오랜 옛날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아틀란티스를 그려본다. 오래 세월에도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석조기둥은 마지막까지 아틀란티스의 영광과 폐허의 역사를 안고 있는 유일한 상징물일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은 오간데 없고, 이제는 해초(海草)에 둘러싸여 그 형태조차도 뚜렷하지 않다. 그와 마찬가지로, 화자의 기억은 아득한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으나, 부지불식간에 의식의 주변부로 떠올라 흔들거린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확실하게 붙잡을 수 없는 막연한 허상(虛像)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세계는 미끄러운 물속의 세계이며, 화자는 그 속에서 꿈을 꿀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꿈이 결코 명료하거나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늘 두려움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두려움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날지 모르기 때문에 화자는 늘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그 두려움을 안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막막한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유적이다.
   유적은 오랜 시간과 역사 속에서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킨다.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도 오래 전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했을 여러 가지 경험들이 의식의 밑바닥에 쌓이고 쌓여 거대한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유적들의 내면이나 밑바닥에는 폐허라는 아픔과 미련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화자가 그 미련들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형상들은 쉽게 부서지고 만다.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적들도 오랜 세월에 의해 힘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내 사방에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폐허와 부서짐과 흩어짐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자라 오르는 물체가 있다. 화자는 바로 그것을 아까시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아까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존력이 강하고, 번식력도 강하다.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언젠가는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 무의식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젠가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 인간은 뜻밖의 상황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게 되거나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깊은 곳에 잠긴 것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고, 비록 허공의 깊이에 두고 하는 행위일지라도 결국 일생은 손을 뻗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화자에게는 아직도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이다. 드러내기 어려워 숨길 수밖에 없는 특별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억을 안고 있는 화자는 마음이 불안하다. 그러기에 새벽 시간마저도 두근거림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깊은 잠을 자지 못한 채 뒤척이며 자꾸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화자는 11행과 12행에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계속해서 깊은 기억의 심연(深淵)에서 무엇인가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긴 과정을 화자는 한 그루의 나무로 형상화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땅속에서 볼 때에는 가장 먼 지점에 있는 꽃을 피우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숨이 차서 ‘후욱’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데, 그 한숨을 쉬는 행위마저도 화자는 향기를 내뱉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어서 예상치 못한 바람도 불고, 외부의 힘에 의하여 끌려 다니는 힘들고 모진 삶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이겨낸 인생,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삶은 반드시 튼튼한 뼈마디를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기억의 힘일 것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의식의 밑바닥에 차갑게 수장된 심해(深海), 즉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리라. 기억에 대한 그리움을 퍼올리기 위해 관절을 꺾고 웅크리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화자는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둔 인생을 밝게 열어줄 혜안(慧眼)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한때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제국들이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하고,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던 나라들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제국들의 패망마저도 인류 역사를 향한 교훈을 주고, 불가분의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에 잠겨 있는 인간의 기억들이 결국은 모든 의식의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듯이, 인간의 역사 역시 길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잃어버린 세계, 아틀란티스. 의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 보이지 않는 그 세계 안에 어쩌면 가장 귀하고 소중한 인간의 지혜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


■ 김승봉 시인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전국 대학생 공모 시 당선(시문학사), 『월간문학』 등단. 시집 『새는 새장에 갇혀서도 제 목소리로 노래한다』. (사)세계문인협회 베트남 지회장. 현)베트남 하노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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