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엠 포커스>
담백한 형사(形似)와 시적 상상력의 아득함
-윤성택 시인의 변형의 시학과 삶의 잠언(箴言)
엄창섭(가톨릭관동대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변형(變形)의 시학과 시적 충동
그 어느 시간대보다 극심한 갈등구도로 치닫는 사회현상에서도 보다 자명한 것은, 창조적 영혼은 위대하고 아름답기에 ‘용서와 통섭(通涉)’을 교시(敎示)한 만델라의 지적처럼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불가능 또한 가능한 현실로 전환될 수 없다. 격변의 현대사회에서 알맞은 변형(變形)의 틀을 조성해야할 우리네 삶에 있어 새로운 자존감에 빛나는 특정한 존재의 시적 매혹과 생명감에 관한 탐색작업은 그만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소외된 관계층위의 회복을 위하여 절망의 늪에 추락하여 허적이는 이들에게 주저함 없이 꿈의 날개를 달아주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최소한 가슴 따뜻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여야 할뿐더러, 오랜 날 미적 주권이 확정된 변형의 시학이라는 기본 틀 위에서 평상심을 온전히 회복시켜야 한다.
일단 ‘세계문학의 구름다리’의 존재감을 표징한 월간 『모던포엠』통권 193호 포커스의 대상자로 확정되어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담백한 형사(形似)와 시적 상상력의 아득함-윤성택 시인의 변형의 시학과 삶의 잠언」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시편인 <늦은 기별>, <예보>를 포함한 10편을 심층적으로 입증하려는 평자의 어설픈 시적 변명이지만, 최소한 시인의 창조적 영혼이 한층 더 미적 형사(形似)로 그만의 격조(格調)가 빛나는 놀라움이다. 따라서 자잘한 기억과 시적 상상력의 집합인 동시에 소소한 삶의 편린(片鱗)과 자연친화적인 물상, 그리고 사유에서 파생된 느낌을 시의 종자로 발아(發芽)시킨 1972년 충남 보령 출생인 윤성택 시인은 2001년『문학사상』 등단 이후에, 시집 『리트머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을 포함하여 시문집 『마음을 건네다』와 산문집 『그 사람 건너기』 등을 다양하게 상재하여 한 시대를 대변할 역량을 지닌 시인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언어의 절제된 힘과 내면적 깊이를 통해 충직한 삶의 내면성을 풀어 보인’ 미적 주권이 확장된 틀 위에서, 어둠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시적 치유의 징표로 입증되는 그 같은 관점은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손등에 스치는 느낌,/ 다시 꺼낼 수 없는 안으로// 고요히 밀랍처럼 말라가는 문장들// 당신은 내 눈동자를 열고 다이얼을 돌린다 (늦은 기별)”의 보기나 또는 ‘와삭, 꽃이 진 건 다 눈 돌린 사람 탓’일지라도 ‘예보에 근력이 생기는’ 까닭도 그렇지만, “태양은 구겨진 티슈처럼 가지를 놓았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볕이었다/ 차단이었다 /아름다운 계정은 모두 창에서 사라졌다/ 나무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바람을 헤집었다 (예보)”를 통한 명백한 상징성은 그 자신의 독자적 시 인식에 의해 지상에 스타카토의 음조로 떨어지는 가벼운 빗방울의 무게로 변형되거나 ‘가끔은 낯선 기별을 알리는 편지나 엽서로 변형되다’처럼 끝내 무한공간으로 비상하는 작은 새의 날갯짓의 조화로움과 깨끗한 수면에 그림자로 투영되는 바람 헤집는 나무의 이채로움에 연유한다.
한편 칼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듯이 ‘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움과 생명기호의 통신’을 당당한 존재감으로 지켜내며, 오로지 그 자신이 추구한 시적 내용물과 기본골격을 ‘생명기호의 통신과 시적 구조’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시적 작위(作爲)는 따뜻한 감성과 자기특유의 음성, 색깔, 느낌으로 채색되어 일순의 격정마저 평정시켜주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음이 파악되어진다. 까닭에 격랑의 시간대를 만보하면서 ‘미래가 외로운 뒤통수를 가졌기에 현실은 회상되고 있음’을 그 또한 확신하기에, 내심 관심이 깊어져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같은 점에 미루어 “카페 문이 닫힌 줄도 모르고/ 계단을 바삐 올랐던 넝쿨은/ 신발 끈이 풀렸다// 삶은 꿈보다 여려서/ 버스를 몇 대 보내고 나서야/ 네가 나를 경유해갔다는 걸 알았다 (빨강머리 앤)”에서도 거듭 입증되어지듯 비록 신발 끈이 풀린 현재성에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신앙처럼 떠받들며 아득한 풍경과 여울의 흐름도 놓치지 않고, 영혼의 진동을 조율하여 절여오는 마음의 아픔도 다독이는 윤성택 시인의 바람처럼 자유로운 시혼은 경이로움 또한 지극하다. 까닭에 자기성찰의 겸허함은 오웬의 지적처럼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라”는 의식의 깨어있음과 정서법에 충직하여 마침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꼼꼼한 심사(心事)는 새삼 감응을 불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2. 삶의 진의(眞義)와 언어의 빛남
그 나름으로 「삶의 진의와 언어의 빛남」이라는 맥락에서, 오랜 날 언어적 속성을 통해 사회의 구체성보다 근원적 보편성을 일관되게 탐색하는 윤성택 시인은, 비교적 개인적이고 토착적인 정서가 이채로운 순수서정의 시간대에서도 다소 현실인식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시편을 즐겨 작동시키는 특성에 견주어, 현실인식의 내면화는 주로 묵언의 응시에 잠식하며 문학과 삶의 경이를 의식하고 이를 성숙시켜나가는 극소수 창조자의 역동성에 의한 그 타당성은 더없이 돋보일 따름이다.
여기서 하나의 유념할 바라면 1995년 청각장애자로 미스 아메리카의 영예를 얻었던 헤더 와이스톤이 ‘이 지상에서 가장 불행한 장애자는 불평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라고 기자의 물음에 답하였듯이 최소한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응당 지극선의 심성으로 화평을 만들어가는 문제의식을 지녀야 한다. 한편 의도적으로 모더니티 한 시의 기법 또한 거부하지 아니한 그만의 시적 발상은 몇 가지의 특성으로 구분되어진다. 바로 그 양상은 전통적인 소재를 자신의 언어로 시화(詩化)하는 노력의 현저함과 삶의 일상에서 수시로 접목되는 다양한 소재의 자유로운 수용과 순수서정의 시학을 확장하여 고정화하려는 경향, 그리고 친근한 소재의 확대와 다양한 어조와 어법을 일상화시킨 생명의 변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서 삶의 연륜을 쌓아갈수록 일체의 생명 앞에서 경건해지려고 마음 비우는 그의 소회(所懷)와 맑은 영혼 앞에서 생명외경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어 지극히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내린 보편성을 지닌 시적 질료의 형상화 조짐이다. 하여 “볼이 발개져 추리닝 바람으로/ 느릿느릿 마을을 거닐다가/ 휘파람 데리고 올 때의 맑은 고독// 막걸리는 그러니까 막걸리까지의 거리가/ 막 걸어온 길이었다 (막걸리)”의 보기처럼 슬로 라이프(Slow Life)적인 ‘느림의 시학’이라는 기교적 처리로 시어의 이중성을 풀어내어 서로의 극간(隙間)을 좁히려는 그만의 고뇌는 더없이 유의미하다. 그렇다. 화자인 그 자신이 제공해주는 막걸리에 의한 취흥과 정한(情恨)의 기저에 깔린 서러움을 매개로 때로는 절망의 그늘을 걷어내고 어둠을 밝혀내며 육체와 상반되는 혼(넋)을 조화롭게 기호화한 그의 정신작업을 숨죽이며, 새삼 음미하는 행위는 하나의 작은 행복이며 아울러 지극히 메르헨적 상상력이 수용된 특이성은 놀랍게도 한순간의 세심하고 치밀한 ‘몸의 시학’을 확증하는 묵언의 수행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 해간다//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다// 어느 민박집에 두고 온 칫솔이 잊혀 지지 않는다/ 칫솔모가 눌려진 채 닦아내고 있을 한때의 적요,// -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인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는 ‘과속 방지턱이 다가올 때마다 글자는 삐걱거리지만 물결 소인(消印)처럼 수첩은 어디론가 페이지를 열어둔다’는 일상의 습관처럼 조급하고 불안한 시 심리는 예증의 실제이다. 현상적으로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라’는 지적처럼 다수의 현대인에게 미치는 스마트폰의 영향과 사고력(思考力)은 상오관계성은 지대하기에, 놀만 빈센트 필의 “한 순간의 분노나 격한 감정이 치솟을 때, 아름다운 기억이나 좋은 시를 떠올리면 마음에 평정을 얻게 된다”는 시적 치유의 반응은 그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 까닭에 피조물인 인간은 유한적 존재일지라도 비굴함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되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 삶의 고뇌를 감내하여 카메라의 렌즈에 투사된 즉물적 대상인 실사(實事)도 때로는 묵언의 응시로 자못 조응(照應)할 점이다. 차지에 정신작업의 종사자의 시적 작위(作爲)는 본질적으로 견고한 고정 체를 소통의 도구인 언어를 기능주의의 매체로 자유롭게 교신한 화자의 시작(詩作) 행위인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에 기인(起因)한다.
한 편의 시는 내면인식의 증상(症狀)에 기인하기에 사회학·심리학·음악학 등에 비판이론이 주입될 수 있다.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한 인자(因子)로 비중 있게 논의한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일찍이 서정시의 죽음을 공언하였듯, 모처럼 윤성택 시인이 그의 시편을 통해 충직한 독자가 감지할 수는 있도록 일관성 있게 풀어낸 인자(因子)야말로, 영혼에 잠식되어 파생된 순수서정성의 형사는 못내 이채롭기에, 사유하는 존재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치거나’, ‘햇살 아래 서서 한참 동안 젖어 있다’는 자의식에 잠시 주저함이 주어질지라도, 인용할 시편의 보기처럼 ‘언젠가 가졌던 그 집착’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해져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 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탈수 오 분간>에서
특히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나는, 꺼질 듯한 모닥불에/ 찢겨진 플래카드를 던져 넣었다 (쓸쓸한 연애)”의 시편을 통한 명백한 확증이라면,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이라는 지적과 더없이 생명적인 꽃은 재생이라는 순환적 이미지로 바슐라르적인 상상력에 의한 식물성의 불이며, 생명의 빛인 까닭에 비교적 그의 시편에 수용된 다양한 꽃의 기능은 계절과 전혀 무관치 아니하다. 또 한편 강인한 생명력의 통로이며 새로운 인자로 작용하는 ‘낡은 홑이불’의 꽃의 표징도 그렇지만, 그 자신의 시편에 폭넓고 다양하게 수용된 ‘비판적, 즉물적, 전체적, 정의와 지성의 종합, 구성적, 객관적 특성을 지니는 효용성’은 한층 이채롭다.
3. 시의미의 순환(循環)과 바람의 통로
근래 절찬리 상영했던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메간 폭스가 연기한 “매기”라는 캐릭터는 한국전쟁(Korea War) 당시의 정황을 취재한 미국의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의 대역이지만, 그녀가 기아와 혹한에 떠는 병사에게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무엇을 소원하겠느냐?”라는 질문에 “give me tomorrow!”라고 절규하듯 답변했듯이, 한 시대를 앞서 숨져간 어제의 그들이 “하루만 더 살았으면…” 하던 그 시간의 끝자락에서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 앞에 주저함 없이 자신을 놓아보아야 한다. 비록 현재적 삶이 힘겹지만 신 앞에서 살아온 날을 감사하는 심사(心事)로 일관하여야할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최소한 ‘한 시대의 예언적 존재이며, 독창적인 예술가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언어의 집을 짓는 시인의 몫’은 마땅히 담당할 바다. 까닭에 세상이 우리를 견디기 힘겹게 할지라도 세상을 온전히 견딜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술뿐이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맑은 영혼의 진동과 강인한 생명감을 삶의 일상에 끝내 접목시킬 일이다.
또 하나 20세기 유대계의 종교철학자로 「관계철학」의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너와 나의 대화법을 천착시켜 생각과 마음을 비우면 영원한 그대인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켰다. 기실 소통을 교감하는 대화는 타자와의 연계층위로 해명되기에 ‘감성의 새로움과 에스프리’의 논의에 있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아틀란티스)”라는 보기의 실상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현상에 잇닿은 이국적인 정신풍경이며 또 다른 자의식이다. 일단 각론하고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삶의 일상에서 서정적 개아에 의한 좋은 인간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사고기능(思考機能)에서 사물을 따뜻하게 응시할 층위의 인식은 작은 기쁨이고 행복한 선물임은 새삼 감성을 확증할 점이다.
이처럼 시의식의 들여다보기는 ‘시적 접근과 창조적 언어, 영혼의 잠식과 시 의미, 시의 틀 짜기와 공간 만들기, 언어의 심연과 시적 치유’를 위한 갈등구조가 내재된 내면인식을 통하여 주의집중과 불멸의 시혼을 이 땅의 독자들에게 당당히 펼쳐 보이며 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을 움켜잡는 예언자적 시인으로서의 엄숙한 소임은 짐짓 수행할 일이기에, 존엄한 삶의 일상에서 자유공간으로 비상하기 위해 날개 짓을 반복하다 가끔은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저녁의 질감)”의 시적 진실에 있어, 보다 존귀한 시인이라면 의식의 자각이 일상의 호흡처럼 지속되고 독자의 지대한 관심사로 공감을 일깨워야 할 바다.
그 같은 맥락에서 홀로 아득한 사유(思惟)를 합리적으로 통용하되 응축된 긴장감이 미끄러짐의 시학에 견주어 그만의 ‘체취, 육성, 느낌’에 의한 시적 고뇌를 충직하게 이행시키되, 현실의 안주함을 거부하고,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시론에 집중할 일이다. 그렇다. 치열한 삶과 직면한 현상에서 ‘시를 쓰려면 최소한 깊은 자기통찰’의 필요성을 의식해야하기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는 음울하다. 비열한 이기주의 때문에”라며, 『쟝 크리스토퍼』에서 로망롤랑은 “행복하고자 사는 것이 아니니, 나의 섭리를 이루고자 사느니라. 괴로움을 당하여라. 그리고 죽어라. 그러나 네가 되어야 할 것이 되어야 한다. -한 인간이”라고 역설하였듯, 지식·정보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병폐를 시적 치유의 추이를 동원하여 다양한 시적 형상화의 조응(調應)은 새삼 기억하여야 한다.
여기서 존귀한 생명의 외경심이 경시되는 세태에서 비록 불안감에 떨쳐버릴 수 없을지라도, 무엇보다 자명한 것은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낡은 자기는 죽고 또 그렇게 해서 한 인간이 태어나기까지 새로운 것을 점철하는 고뇌의 시간이 처절하기에 창조적 영혼은 더없이 아름답고 위대하다. 까닭에 ‘같은 시간 같은 음악을 듣는 이들은 서로를 잇대며 이룬 외로운 기지국이다’라는 화자인 그 자신의 전제(前提)는 어쩔 수 없지만 “붉은 막대채널 같은 가로등이 길 위를/ 밀려가고 가끔 개 짖는 소리가 잡힌다/ 거미줄은 스피커처럼 웅웅거린다/ 배달 오토바이가 LP판 소릿골을 긁으며/ 좁은 골목을 돌아나온다 불빛에 꽂힌/ 사소한 소음도 이제는 모두 음악이다 (FM 99.9)”를 통한 이해력은 다행스럽게도 슬로 라이프(Slow Life)적인 ‘느림의 시학’과 연계층위로 결속(結束)되어 비록 화자(persona)인 그 자신이 ‘차갑게 수장된 심해의 밤, 먼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는 가슴 두근거리는 여명의 시간대에서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 나름의 의미망을 이처럼 확장시켜주고 있다.
또 하나 인류의 시성(詩聖)인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하였듯이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생명은 자연의 순차(循次)를 역행하지 않고 변형되기에 생체리듬 또한 멈출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삶의 일상에서 존엄한 삶의 외경심을 새삼 부추겨, 눈부신 자존감을 회복할 열림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모름지기 시평의 말미에서 특정한 시인의 묵시적 항변처럼, 삶의 격랑에 문제의식 없이 영혼을 상실한 육체를 내어맡기거나 막연히 시대적 사조(思潮)에 연연하지 말고 끊임없이 ‘홀로 있기’라는 깊은 사유(思惟)를 통해 의식이 깨어 있는 윤성택 시인의 경우, ‘전통의 실타래를 다시 꼬며, 출어를 위해 찢어진 그물코를 피멍든 손으로 다시 깁는 치열한 시인의 시혼’을 실천궁행하고 온전한 소통의 도구로 미적 주권이 확립된 시적 행위에 깊은 애정과 일관된 열중으로 오로지 주의 집중하여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말끔 정화시키듯 날(刃) 푸른 시 정신을 스스럼없이 적용시켜 어디까지나 ‘작은 신의 대언자’로서 타자의 상처 깊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하고 불확실한 현재성일지라도 자존감을 지켜내며 막중한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할 바다.
ㅡ월간 『모던포엠』 2019년 11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