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야성을 감지하다>
혼성적이고 매트릭스적인 언어
- 비 혹은 빗소리라는 이모티콘
낭만적인 서정을 자아내기로 ‘비’만 한 자연현상도 드물다. 윤성택 시인의 ‘비’ 역시 정서적 심화에 기여하는 매개물로 작동한다. 그의 ‘비’는 “추억”을 불러오고, 그로 인해 화자의 내면은 우울하다. 일찍이 정지용 시인이 「비」를 통해 일제 말기를 견디는 자의 “수척한 내면”을 그려냈다면, 윤성택 시인의 ‘비’ 역시 화자의 “야윈” 내면과 등가를 이룬다. 그렇다고 그의 ‘비’가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는 정서, 즉 하강적 이미지를 노리는 지극히 일반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건 다소 섣부른 판단이다. “일주일 전 내가 사랑했던 구름이/ 내일의 예보에 서성”이다 내리는 이 ‘비’는, 화자의 외부에서 내리지 않고 그의 내부에서 호출되기 때문이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에서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즈음의 이모티콘들처럼, 시적 형상화는 기호화된 이미지의 활용으로 다분히 구축된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비’는 객관적 상관물로 존재하는 외부적 풍경이 아니라 시인만의 개인적 기호다. 그러므로 앞서의 설명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비’는 ‘추억’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마음’이란 언어가 놓일 자리에 ‘비’가 대신 ‘클릭’되어 와서 내린다고 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것은 ‘상황’의 재현으로 말미암는 내면 묘사가 아니라 언어를 대체하는 ‘상황’이다. 이 점을 다음의 시는 잘 드러낸다.
일주일이 지나자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날에 가서 무수히 나와 작별했으므로
여기에 이대로 존재한 적이 없다
일주일 전 내가 사랑했던 구름이
내일의 예보에 서성인다 그러나 시간을 흘리고
그러다 엎은 길 위에 주저앉아
추억이 젖는 불우(不虞)
비는 불빛에 비추어질 때 야윈다
나는 요일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나를 건너간 생각은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영영 타인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내가 일주일 만에 돌아와
낯선 나를 쓰다듬는 상상,
몸을 잃어버린 사람이 떠도는 저녁
피처럼 붉은 일주일이 저물고
아직도 나를 안고 길을 헤매는 나
- 「일주일」 전문
<중략> 이렇듯 익숙한 사물이나 자연현상을 기호화하고 기호와 기호 간의 전이를 빚는 이 ‘리트머스’적 상상력은 “몸을 잃어버린 사람이 떠도는 저녁”처럼 쓸쓸하다. 나아가 “피처럼 붉”고 고통스러운 ‘일주일’을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기억’은 윤성택 시인의 시에서 반복되는 테마다. 이번 발표한 작품들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진다. “추억에 세들어 살면서/ 당분간 꿈을 지어 먹는다”거나 “언제나 쓸쓸하게 뜨겁던 아랫목 자취방,/ 캄캄한 십 년 전 집이 매번 찾아”(「당분간」)온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에게 “비가 더듬는 풍경”은 “잊혀진 무엇이/ 안간힘으로 본을 뜨는 작업”이거나 “추억이 오래/ 본을 떠”가는 정경이다. 이를테면 장맛비의 “일정한 듯 일정하지 않은 저 두드림은/ 한때 거적에 덮여 죽어가는 심장 박동” 소리로 화자의 귀에 들려온다. 해서 비는 생의 마지막을 목도한 사람의 증언처럼 내리고, 그 눅눅한 기운을 타고 “거리가, 벽들이, 머리칼이, 살갗이/ 저편 어딘가에서”(「장마」) 망자들의 혼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괴테가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상’을 ‘시와 진리’로 명명했듯이, 시는 주체의 경험을 곧잘 진리로 수렴한다. 그리고 존재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이 “거대한 유적”(「아틀란티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은, 그의 시에서 매번 낯설고 독특하게 각인된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은 있으나 그러한 강박 자체가 진부해져 버린 이 시대에, 시인은 개인적이고도 인공적인 조명을 언어에 비춤으로써 미학적 실천을 진중하게 답파한다. 다음 시는 사물이나 현상의 기호화 및 그 기호의 자율성이 더욱 복잡하고 주관적이다. 어쩌면 그는 낡은 방식을 허물고자 하는 노력을 넘어, 개인의 언어로 기록된 유일한 사전을 기획하는 하는지도 모르겠다.
방에다가 구름을 부려놓고 이슬을 마신다
열린 창으로 첨잔 하다만 비가 책장의 책들을
울게 내버려둔다 쭈글쭈글한 커튼을 걷으면
외곽 골목이 가로등에 딸려 나와 한 점씩 들린다
이 곳의 안주란 술술 이어지는 불만족 같은 것,
내일은 언제나 약속을 떼다 파는 데에 열중이고
모레는 외상이 심해 신념을 입원시키지 회색 벽을
넘겨본 후로 타이레놀이 가장 빠르다는 걸
두통의 MF에서 느끼네 필드에서 가장 외로운 이는
하루가 교체되어도 모르는 12시의 고립,
비가 계속 내려야 창문이 당신을 타전한다
그리고서야 마개 따듯 그 힘으로 겨울이 넘친다
이 밤 빗소리 빚어내는 발효가 독하므로
어떠한 술책으로도 구름에 리시버를 꽂지 말 것
여기서부터 다시 받아 적어야 밤이 함부로
위독한 이름들을 건너지 않는다
- 「겨울이 넘친다」 전문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극단적으로 말해, 「겨울이 넘친다」의 발화 주체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텅 빈 공백이 추동하는 어떤 지점이다. 시는 마치 자의적으로 선택한 낱말 하나를 먼저 던져둔 후, 그 뒤를 연상 가능한 낱말과 서술적 맥락으로 거칠게 기워나가는 형국이다. 예컨대 “이슬을 마신다”가 선행하므로 비가 긋는 정경은 술이 들어 있는 잔에 술을 더 따르다 마는 “첨잔하다 만”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문학의 내용과 형식을 이해하려는 데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필자가 임의로 짙게 표시한 저 낱말들과, 그리고 이상한 모호함으로 가득한 서술어들을 굳이 한국어의 통사법과 관련해서, 그리고 익숙한 사전적 의미로 ‘번역’해야만 하는가가 그것이다. 아니, 다수의 소통을 보장하는 동시에 시의 육체와 정신을 훼손하지 않고 ‘윤성택식’ 스타일을 보존하는 ‘번역’이 과연 가능한지가 의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자구대로 해석할 경우 우리가 얻어낼 의미는 혼란스럽거나 매우 궁색해진다. 기의를 무시한 채 어휘와 어휘가 닥치는 대로 접속하고 몸을 섞는 혼성적 언어 방식이 자명성의 기호 체계를 하나하나 비틀고 흩뜨려 놓아서이다. 확정된 의미를 끝없이 유예하면서 다만 어휘가 가진 ‘물질성’과 문맥의 ‘기미’를 체험케 하는 이러한 방식은, “불만족”이라든가 “외로”움이라는 보고 만질 수 없는 정서에 독자가 좀더 가까이 접근하도록 만든다.
<중략> 이렇듯 윤성택 시인의 작품 내부로 침입해서, 모순 없이 그 내부를 횡단하기란 몹시 어렵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최악의 협약인 언어를 공격하기 때문이다.”라고 브르통은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전언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을 보게 허용하는’ 윤성택 시인의 언어활동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지침이 된다. 그는 차가운 사물의 개인적 기호화, 재현이 아닌 기호로서의 이미지, 기호와 기호의 전이와 혼성을 통해 “이제 우리의 감각은 브라운관이나 액정화면을 읽어내는 눈만 남은 것은 아닌지.”(『감(感)에 관한 사담들』)라던 앞서의 질문을 이어간다. 결론적으로, “기이한/ 생각의 자신을 알아채”(「장마」)려는 윤성택 시인의 행보는 인공의 매트릭스적 언어를 통해 혼성적으로 뜨겁게 육화된다. 이 역설이야말로 우리가 그의 시에 주목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신상조 문학평론가
201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 《詩로여는세상》 2013년 겨울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