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동양미학으로서의 시
인간은 소우주고 자연은 대우주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일대일 대응한다. 둘 사이는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나 소립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소립자들이 지닌 진동을 초끈으로 하여 서로 이어져 있다. 이는 물리학 명제이지만, 미학은 철학과 과학을 포괄한다. 특히 동양미학은 미물에도 우주가 깃들어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윤성택은 작고 평범한 대상, 사소한 일상적 체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 우주적 차원의 비가시적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다. 이번에 발표한 시들에서 그는 ‘나’라는 소우주가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에너지 삼아 ‘자연’, 즉 대우주와 상응하는 과정을 최소한의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그의 시는 단순해보이지만 행간의 여백과 비약 속에 이미지와 사유가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다. 이런 특징으로 그의 시를 동양미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전적이지는 않다. 윤성택은 전통적 서정과 현대적 감각을 조응시켜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달은 열쇠구멍으로 방 안의 나를 보고
나는 달을 꿰매 눈썹에 매단다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하는 모든 말은
검은 맨홀의 배관으로 흘러가는 걸까
정직은 지루하고 가난은 마음에 들여놓은 게 많다
더는 버릴 수가 없어서 나를 갖는다는 건
더더욱 사치인 추억이 영하에 있다
어디서든 울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을 수분으로 삼는다 그대를
알아간다는 것 또한 어딘가 잃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봄이다 라고
깜박일 때마다 신호등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꽃말들, 터진 봉투처럼 웃는다
어차피 오늘은 별을 켜지 않아도
되는 날이니까
―「만월(滿月)」전문
‘달’과 ‘나’는 ‘열쇠구멍’을 통해 동일선상에 놓인다. 원형이라는 형태적 동질성이 하나의 질서로 작용할 때, 소우주인 ‘나’의 눈은 대우주인 ‘달’이 된다. “달을 꿰매 눈썹에 매단다”는 문장은 이에 대한 탁월한 은유다. 형태적 동질성은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하는 모든 말”과 “검은 맨홀의 배관”에도 적용된다.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하는 말을 이 시에서만 찾아보면 ‘마음’, ‘사람’, ‘봄’이다. 이 말들의 기의는 달의 성질과 같아서 모두 차고 기운다. 마음도 사람도 시간도 ‘만월’처럼 찼다가 쇠잔해져 ‘검은 맨홀’의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달’의 주기는 늘 동일해서 정직하고 또 지루하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생 역시 마찬가지다. 달도 나도 ‘가난’하다. 달의 가난은 태양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광량(光量)이고, 나의 가난은 물질이면서 비물질인 ‘사람’에 대한 것이다. “마음에 들여놓은 게 많다”는 것은 달로서는 ‘만월’을 의미하고, 나로서는 ‘그대’라는 실재를 가지지 못해 고독과 그리움이 많다는 뜻이다. 화자는 이렇게 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달과 동일화한다. “어디서나 울 수 있는 사람”인 ‘나’의 시간이 마치 물과 같다는 이야기는 그 동일화의 고백이다. 달이 차면 바다는 밀물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는 썰물이다. 달과 물은 서로 밀접하다. 달이 보름에 이르면 삭(朔)도 그만큼 가까워진다. 시인은 “그대를 알아갈”수록 이미 “어딘가 잃어간”다는 인간관계의 통찰을 달의 주기와 조석간만의 차라는 우주적 질서로 형상화하고 있다.
마지막 연, ‘봄’이라는 기표의 발음방식과 ‘신호등’에서 다시 원형이라는 동질성이 나타난다.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하는 말”인 ‘봄’과 신호등의 삼색불은 모두 ‘달’처럼 둥글다. 봄과 신호등과 달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봄은 신호등에서 꽃(빨강, 노랑)과 잎(초록)이 되고, 신호등의 점멸은 달이 뜨고 지는 것과 같다. 시인은 ‘달’과 사물과 ‘나’를 동일화시키며 달에 대한 새로운 공감각적 상상력을 다채롭게 펼쳐 보이고 있다.
‘만월’에는 달이 밝아 상대적으로 별이 어둡다. 그래서 “별을 켜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별은 이미 수억 광년 전에 소멸해버린 빛,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은 육안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는 일과 마찬가지다. “마음에 들여놓은 게 많”아 고독이 ‘만월’을 이룬 밤, 화자는 추억들, ‘그대’로 수렴되는 모든 기억들이 이제는 멀고 희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항성처럼 다가오는 불빛들
나는 속도가 마음의 밀도를 거쳐
추억이라는 간판을 지난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오랜 후 꺼내 봐야할 낯선 밤
기념이란 이렇게 앵글 안인데
나는 도무지 시가 사진을 위로할 것 같지 않아서
잠시 훗날의 한낮에 서 있는다
누군가 나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시간이 애초의 첫인상으로 링크된다
이제 나는 너의 과거에 가서
내 이름을 적는다
불빛처럼 다가오는 항성들
―「인화(印畵)」전문
물리학을 포괄한 미학적 양상은 이 시에서도 나타난다. 윤성택은 ‘사진’이라는 일상적인 소품을 우주적 현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항성’은 별이고, 별은 곧 ‘불빛’이다. 그리고 빛은 ‘속도’, 즉 시간이다. “속도가 마음의 밀도를 거쳐 추억이라는 간판을 지난다”는 문장은 시간과 중력에 대한 은유다. ‘마음의 밀도’가 빽빽할수록 추억을 많이 지닐 것이다. 중력이 강한 행성이 더 많은 별들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중력의 법칙 안에서 “오늘은 오랜 후 꺼내 봐야할 낯선 밤”이 된다. 멀리서 별이 반짝이면 훗날 먼 행성에 그 빛이 도착하는데, 그때 별은 소멸된 후다. ‘오늘’ 찍은 사진은 “오랜 후 꺼내봐야 할” 추억이 되지만, ‘오랜 후’에 ‘오늘’은 이미 없어진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훗날의 한낮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일직선상에 놓는 일이다. ‘사진’은 과거의 시간이며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현재다. 또 사진 속 시간의 관점에서는 사진 바깥의 오늘이 미래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인화’하는 순간 시간왜곡이 일어난다. 그때 화자는 “너의 과거에 가서 내 이름을 적는다”. 사진을 인화하는 ‘현재’에서, 필름이라는 ‘과거’에 ‘내 이름’을 적으면, 인화된 사진을 꺼내볼 ‘미래’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기대해보는 것이다.
밖은 파랗고 생각은 굴참나무 밑입니다. 하루가 쓸쓸한 어느 간이역이어서 차를 세우고 풍경이 차창을 내립니다. 설핏 스치면 그새 저녁놀입니다. 어둑해지는 사위 속에서 붉은 신호등만 바라봅니다. 기다리는 시간, 그 짧은 순간이 일생이라면 어떨까요. 기억이 가지는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늘 숨 쉬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며 그 기억의 한 가운데 몸을 데려가 놓곤 하지요. 그러니 세월은 여러 개의 기다림을 잇대어 누빈 피륙만 같습니다. 결국 밤은 낮을 데리고 새벽에 한 번 더 여행을 떠납니다. 꿈은 삶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꿈으로 환기되기 위해서 마련해놓은 시간이 아닌지요. 감정의, 격정의 끝점에서 세상은 잠시 멈추고, 저녁해가 느리게 그 호흡을 끌어당깁니다. 이렇게 자판이 나를 앞서갑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안부(安否)」전문
윤성택의 미학적 방법론은 이 시에 와서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차원으로 나아가 프로이트적 상상력으로 변모한다. 이미지와 서정은 단순한데, 막상 그 내부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화자는 ‘파랗’게 어스름 내린 시간에 차를 몰고 굴참나무길을 지나고 있다. “하루가 쓸쓸한 어느 간이역”처럼 저무는 중이다. “풍경이 차창을 내린다”는 묘사는 화자가 풍경에 사로잡혔음을 의미하지만, 자신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의한 행위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는 정지 신호에 멈춰 선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차창을 내린다. 그러고는 “기억의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한다. “늘 숨 쉬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면 그 기억의 한 가운데 몸을 데려간”다는 진술에서부터 의식과 무의식 세계에 대한 시인의 시적 해석이 출발한다. ‘늘 숨 쉬는 시간’이란 의식이 활동하는 낮이고, 교통신호 체계로 치자면 차가 달리는 초록불의 상태다. 의식이 기능하는 시간에 무의식은 억눌린다. 그러나 의식이 기능하지 않는 밤, 수면 상태에서는 무의식이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초록불일 때, 운전자의 의식은 운전이라는 행위에 집중된다. 빨간불에 멈춰 섰을 때에야 운전자는 운전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나 “기억의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밤은 낮을 데리고 새벽에 한 번 더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밤’은 수면의 시간이고, ‘낮’은 의식에 의해 억눌렸던 무의식의 반어적 상징이다. 그리고 ‘새벽’은 억눌렸던 무의식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꿈의 시간이다. 잠은 낮에 채 발현되지 못했던 무의식들을 꿈속으로 데리고 가는 여행인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무의식은 “감정의, 격정의 끝점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의 숨소리’, 어떤 대상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다. “세상은 잠시 멈추고 저녁해가 느리게 그 호흡을 끌어당”길 때, 순간적으로 무의식이 의식을 앞질러 화자는 누군가를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자신이 쓰려고 ‘의식’한 문장은 따로 있는데, “자판이 나를 앞서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무의식이 적는다.
잠들기 직전의 눈빛을 여기에 묻는다
눈을 감으면 아침이란 걸 안다, 결국
꿈은 언제나 내일에게서 차용된다
왜 이리 잠이 뒤척이는지
지금 이 적막과, 반쯤 감긴 왼쪽 눈과,
이 시간이라는 쓸쓸한 감촉
나는 아직도 테트라포드에 부서지는
이 밤의 외항이다
감정이 밀항을 꿈꾼다
―「감회(感懷)」전문
“잠들기 직전”은 “눈을 감으면 아침이란 걸 아”는 순간이다.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낮 동안 가라앉아있던 멜랑콜리가 정신의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리움이라는 추상일 수도 있고, 우울하면서도 낭만적인 기분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대상과 관련된 기억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멜랑콜리는 ‘밤’이라는 바다를 건너 ‘내일’이라는 낯선 육지에 닿는 동안 사라지고 만다. 화자는 그것이 싫어서 “잠이 뒤척이는” 중이다. 그리움과 기억, 감정들을 떠나보내는 ‘외항’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잠들기에 ‘외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정이 밀항을 꿈꾼다”. 화자는 잠들기 직전에 느끼는 자신의 감정들이 이성과 의식, 또는 망각이라는 ‘세관’을 피해 무사히 ‘내일’까지 도달하기를, 손실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시인은 추상적인 감정을 “잠들기 직전”이라는 구체적 삶의 체험, “테트라포드에 부서지는 외항”이라는 객관적 풍경에 입히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상은「파고(波高)」에서도 나타나는데, “격하게 다가왔던 사랑도 수면 아래/ 휘감기는 물살 같아 먹먹하다// 마치 오래 정박한 배처럼 나는/ 흔들리며 새벽으로 떠 있던 것”에서 감정은 “격하게 다가왔던 사랑”, 의식과 무의식은 “수면 아래”, “새벽”, 자아는 “오래 정박한 배”, “흔들리며”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시는 미학(美學)이다. 아름다운 현상, 아름다움의 가치, 아름다움에의 체험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자신의 내부 속으로 시인을 끌어당겨 침잠시키고, 시인은 오감과 사상으로 전유한 아름다움의 무한 질량을 자신의 언어 안에 고밀도로 압축해낸다.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고 시인은 그 아름다움을 훔쳐가는 자, 그래서 신에게 형벌 받은 자, 신이 만든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재창조해내야 하는 노역에 처해진 자다. 정말 새삼스럽다. 누군들 모를 리 없는 이야기로 글을 닫는 것이 민망하다. 하지만 하나의 미학으로서 잘 완성된 시 세계를 만난 즐거움이 이런 일반론을 다시 환기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다는 요즘의 난해시들이 추상학과 기하학, 정체불명의 철학인 반면 윤성택의 시는 미학이다. 그의 시선은 육안의 세계에서 출발해 미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세계에까지 닿는다. 그는 언어의 경제적 운용을 통해 관념은 함축하고, 이미지는 증폭시키며, 정서의 파동까지 두루 이루는, 분명 드문 시인이다.
이병철 시인
2014년 《시인수첩》 시, 2014년 《작가세계》 평론 등단.
ㅡ계간 『시와사람』 2015년 여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