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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을 두드리다 - 고명자

2005.03.18 10:18

윤성택 조회 수:1763 추천:185

<봄볕을 두드리다> / 고명자/ 《시와정신》 2005년 봄호 신인당선작 中

        봄볕을 두드리다

        춘삼월 달력처럼 담벼락에 붙어
        팬지나 선인장 등을 파는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볕이 잘 드는 쪽으로 생을 옮겨보는 남자가 있다
        흙 한줌에 용케 뿌리를 내리고
        소꿉놀이에 깊이 빠진 어설픈 중년
        빳빳한 새 봄으로 거슬러 주기도하면서
        봄볕 만지작거리다 그냥 가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꽃 따위나 사랑을 하다가
        햇살을 등지고 앉아 깜박 졸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유리창에는 매화를 뜯어 붙이고
        모란 문양을 떠 가난을 땜질하면서
        개다리소반에 김치찌개 한 냄비 소주 반 병
        헐벗은 행복을 훌훌 떠먹다
        난전의 꽃, 다행이다 그늘 한 뼘은 깔고 앉았다
        등줄기 꼿꼿하던 꿈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돌다 둥그러진 남자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다는 듯
        국방색 어깨를 담벼락에 척 걸쳐놓고서

[감상]
봄볕 따뜻한 담벼락에서 화분을 파는 남자, 어쩌다 그의 삶이 막다른 담벼락에 다다른 것인지를 생각하다보면 이 시가 아슴아슴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에게도 청춘이 있었을 것이고,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지나왔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자신만의 시선으로 투영하는 솜씨가 좋습니다. 지금 밖처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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