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알리바이」 / 이성목 / 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봄, 알리바이
여자의 몸에서 휘발유 냄새가 난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꽃들은 만만한 나뭇가지를 골라 호객을 일삼는다. 나무들은 비틀거리며 꽃 가까이서
꽃값을 흥정한다. 이미 몸에 불을 당긴 꽃잎이 재처럼 떨어진다. 꽃을 만났던 나무들은
순한 잎의 옷을 걸쳐 입는다. 내 몸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난다.
기억한다.
나는 붉고 여린 수술을 내밀었을 것이다. 목련은 순백의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으므로,
세상과 나는 서로 결백했을 것이다.
기억한다.
그 해 3월 마지막 날, 영등포 선반 공장 뒷골목, 홍등가, 절삭유 질펀한 바닥, 생의 마
디가 손가락처럼 잘려나가던 어둠 속, 늙은 가로수처럼 서서 전화를 했으며, 안산행
총알택시를 탔다.
멀고도 아득했던
불혹에 닿아 몸의 곳곳에 만져지는 꽃자리 아직도 아프지만
그곳에는 꽃도 나무도 없었다. 나도 그때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감상]
지금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봄이었던 과거의 어느 추억을 부정하는 흐름이 돋보입니다. ‘휘발유’로 상징되는 불안한 청춘 같은 것, 그리고 홍등가 여자와의 사랑, 절삭유 질펀한 냄새 같은 것…, 슬픈 음악처럼 치열하면서도 아슴아슴한 감정이 배여 있습니다. ‘나도 그때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로 부정되는 의미는 아이러니하게도 강한 존재의식을 불러일으키는군요. 마음 속 느슨했던 볼트가 조여지는 시입니다.
영등포 뒷골목은 아직도 붉은 꽃들이 활짝 핀 골목인지...
나무들이 취한 밤이면
꽃들이 나무를 원하는지...나무가 꽃을 원하는지...
3월 마지막 날
꽃도 나무도 세상도 보이지 않았던 어둠 속,
봄이므로...
꽃이 핀 봄이었으므로
봄,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흔들림은 무죄입니다
목련은 순백의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으므로,
세상과 나는 서로 결백했을 것이다.
인상적인 시 입니다 ^^*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