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 김지하 / <우리시대의 문학> 5집 中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가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감상]
술 취해 손 붙들고 토할 수 있는 친구, 코 풀고 나서 함께 잿빛 하늘 바라볼 수 있는 친구. 이런 친구와 우리는 얼마나 걸어온 것일까요. 이 시를 읽다보면 무화과로 비유되는 ‘꽃시절’이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꽃처럼 활짝 펴 아름다웠던 시절이 없었다는 쓸쓸함이 이 시의 깊이를 더합니다. 대화체로 간결하게 이어지는 물음이, 시대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와 닿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절망은 본질의 이해에서 터져 나오는 괴로움 같은 걸까. '검은' 것들의 길에서 문득, 나는 누구의 친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