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 김상미 /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민들레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
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날 찾아가 보면, 어느
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
렇게 일생에 꼭 한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
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감상]
민들레는 수백 개의 갓털이 달린 낱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쉼표와 쉼표 사이 이러한 갓털의 이미지가 마음에 흩날립니다. 그 한 표현이 어디로 날아가 앉을 지에 따라 제각각 소통이라는 꽃도 피겠지요. 이 시의 포인트는 민들레 씨앗을 ‘재’로 본 직관에 있는데, 활활 타올랐던 사랑이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존재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았던 작은 민들레는 누구의 사랑이었던 것일까, ‘너에게 꼭 한마디만’이 자꾸만 이명(耳鳴)으로 남는군요.
이 시도 참 좋았드랬습니다.
복사꽃 피는 언덕에서 - 김상미
엄마, 복사꽃이 피었어요. 사람 사는 근처에 피어야 더 아름답다는 복사꽃, 복사꽃이 피고 있어요. 전생이 복사꽃이어서 아직도 내게 그 향기가 묻어 있다는 복사꽃, 느껴봐요. 꽃의 숨결, 꽃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못잊을 그리움은 저렇게 휘파람으로 부는 것이라며,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저 칼날 같은 꽃향기들, 눈으로 코로 입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그 향기로 진달래 화전 대신 복사꽃 화전을 만들어 먹었어요. 들어봐요. 엄마, 나예요, 나예요, 나라고요, 하며 내 영혼이 조각조각 꽃잎으로 전율하고 있어요. 복사꽃 한 잎 한 잎에 묻은 겹겹의 세월들이 온몸으로 환한 봄언덕을 물들이고 있어요. 꿈만 같은 봄바람 온 힘으로 앞서가고 있어요. 내 마음 깊이 잠든 엄마까지 깨우며, 이 세상 모든 머릿속 새장 문 활짝 열어제치고 있어요,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환장한 찰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