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 최문자 /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실명
흠집이 많은 과일이 좋았다
열망할 적마다 찌무러진 그 자리가
흉할수록 좋았다
한사코, 불구의 반점으로 남고 싶은
위험한 사상은
가을을 기다려 오히려 흉터가 되었다
흠집이 많은 과일일수록 좋았다
용서할 수 없어 한없이 헛구역질하던
그 자리가 좋았다
아플 것 다 아파본 것들
실상은 눈이었다
밖으로 흉하게 자란 눈이었다
꿈꾸고 있다가 실명된 눈이었다
감긴 눈이 많은 과일이
나는 좋았다
꼭 감고 흘린
그 어두운 눈물 자국이
더 없이 좋았다
[감상]
세상을 온몸으로 맞서온 흉한 것들에게 다시금 눈길이 가는 시입니다. 흠집에서 흉터, 그리고 실명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흐름이 직관과 어우러져 좋은 발견을 주고 있습니다. <눈(目)>은 결국 바라봄에서 나아가 희망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니 좌절하더라도 그 흠집만큼은 그 어떤 상징보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특히 미묘한 감정 전이도 이 시의 매력적인 부분인데요, 그 <좋았다>라는 울림에 산뜻하게 매료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