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삭제> / 이신 / 2005년 ≪포엠토피아≫ 신인상 당선작 中
즐거운 삭제
사라지는 것은 즐겁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즐거웠다
기억되는 것 보다 지워지는 방법이 어려웠다
송곳이나 칼끝으로 내 몸을 긁는 일,
상처 입은 표면에서 어머니는 조용히 아팠다
어머니라는 딱지를 떼어낼 때 내 아픔은 통쾌했다
나의 왼쪽을 클릭해서 어머니를 불러낸다
나의 오른쪽을 한번 클릭하면 밥이던 어머니와
돈이던 어머니가 폴더를 열고 나온다
좋은 순간만 남겨두고 삭제, 낡은 어머니는 휴지통으로
버려지고 그 모습이 즐겁다
달콤한 삭제, 쿨한 삭제
키가 작다는 이유, 교양이 없다는 이유
나는 똑바로 서 있는 인물인데
풍경인 어머니가 30도는 틀어져 있다
현재 이전의 나도 삭제한다
나는 소용량의 하드디스크이므로
선택적인 기억은 불가결했으므로
선택적인 기억상실도 숙명이었다
오랜 기억의 방법도 삭제한다
다시 씌어져야 하는 어머니는 비로소 따뜻하다
새로운 기억은 삭제된 기억 위에 집을 짓는다
아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재혼으로부터 유래된 선택적 기억상실증
나는 매일 어머니라는 이름의 옛 파일을
지운다
[감상]
가족사의 아픈 내면이 컴퓨터의 '삭제' 기능과 맞물려 잔잔한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고, 또 그것을 잊기 위해 애써 외면해왔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 시에 내재되어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는 이러한 감정과 결합되면서 삭제와 업로드의 심리로 드러납니다. 각박한 기계문명이 우리의 기억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현실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습니다.
어머니는 어른이되서도 몇일동안은 잊어야 된다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