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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 이기철

2005.06.02 11:12

윤성택 조회 수:1597 추천:208


<봄밤> / 이기철/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봄밤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감상]
봄밤의 정경과 어우러지는 잔잔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시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서정적 비유도 돋보이지만 <우리는~왔다>로 맺음 되는 통찰이 강한 인상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천근 무게로 느껴질 때, 이 시가 왠지 연민의 심정으로 삶을 이해하게끔 하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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