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 이기철/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봄밤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감상]
봄밤의 정경과 어우러지는 잔잔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시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서정적 비유도 돋보이지만 <우리는~왔다>로 맺음 되는 통찰이 강한 인상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천근 무게로 느껴질 때, 이 시가 왠지 연민의 심정으로 삶을 이해하게끔 하는 것만 같습니다.
생각보다 나이가 꽤 많은 걸요!
그의 또다른 시도 한 번 읽어볼까요?
여기에 우리 머물며 - 이기철
풀꽃만큼 제 하루를 사랑하는 것은 없다
얼만큼 그리움에 목말랐으면
한 번 부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필까
한 송이 꽃이 피어 들판의 주인이 될까
어디에 닿아도 푸른 물이 드는 나무의 생애처럼
아무리 쌓아올려도 무겁지 않은 불덩이인 사랑
안 보이는 나라에도 사람이 살고
안 들리는 곳에서도 새가 운다고
아직 노래가 되지 않은 마음들이 살을 깁지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고
보석이 된 상처들은 근심의 거미줄을 깔고 앉아 노래한다
왜 흐르냐고 물으면 강물은 대답하지 않고
산은 침묵의 흰 새를 들 쪽으로 날려보낸다
어떤 노여움도 어떤 아픔도
마침내 생의 향기가 되는
근심과 고통 사이
여기에 우리 머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