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성냥 / 유형진/ 《내일을 여는 작가》2005년 봄호
UN성냥
고양이가 테이블 위의 성냥갑을 밟고 지나간다
빌딩 난간 위에서 사람들은 성냥개비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유황
을 바른 붉은 머리, 몸은 얇은 사각의 나무막대가 되어 떨어진다. 도
시는 이제 한 개비의 성냥도 받아주기 힘든 상황이다. 이 도시엔 어
제도 내일도 없고 아기를 키우는 공포와 질긴 목숨을 연명하는 일만
남았다. 성냥개비로 변하며 떨어지는 사람들의 눈에선 성탄 케이크
에 꽂힌 초의 촛농 같은 눈물이 흐른다. 눈물은 흘러내리기도 전에
볼 위에서 굳어간다. 성냥개비들이 아스팔트를 들이받으며 머리통
에 불이 붙는다. 성냥개비가 되지 못한 낙상자들의 시체와 점화되지
못하고 부러진 성냥개비가 거리에 쌓여간다. 이 도시에는 이제 젖먹
이를 가진 여자들만이 유일하게 간절하다. 남자들은 빛깔 좋은 넥타
이로 목을 매거나 사우나 실에서 두건을 쓴 채 죽어가고, 방송국에
선 먼지 낀 마그네틱테이프에 담긴 캐럴송을 송출하고 있다. 지그지
그, 징글, 징글, 징글벨 캐럴송이 타오른다.
[감상]
성냥갑이 엎질러져 쪼그리고 앉아 하나씩 주워 담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성냥갑이 쏟아지는 일에는 난감함과 곤란함이 앞섭니다. 이 시는 그런 이미지로 현대사회와 매치시키며 사유를 진전시키는 흐름이 좋습니다. 고양이가 밟고 간 성냥갑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짧은 풍경이 클로즈업되면서, 삶과 죽음 혹은 공포가 재배열됩니다. 특히 화자의 간절함은 <아기를 키우는 공포>와 <젖먹이를 가진 여자>에게 가닿아 <생명>에 대한 의미를 곱씹게 합니다. 그래서 어느덧 징글맞은 <징글, 징글, 징글벨>이 상식이 되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