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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 플레이어 - 김백겸

2005.07.18 16:31

윤성택 조회 수:1210 추천:190

<시디 플레이어> / 김백겸 / 2005년 《문학마당》여름호


        시디 플레이어

        데이터 신호가 끊어졌다

        강물처럼 흘러서 베토벤의 ‘합창’과 슈베르트의 “마왕‘을 앰프로 보내던
        물줄기가 어디서인가 말랐다
        붉고 파란 신호등의 불이 나갔다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위해 모든 조치를 강구한 의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어떤 시디와 전기로도 상상력과 기쁨을 불러낼 수 없는 치매의 순간이 왔다

        너는 바람이 노래를 부르던 낡은 집
        너는 침묵이 연주를 하던 비밀 방
        너는 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고 잠시 잠을 자거나 꿈을 꾸던 안락의자
        뇌에 기름이 마른 노인처럼
        산소와 링게르를 제거하고 영안실로 보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듯이
        금속은 금속으로 돌아간다
        기계를 움직이던 메커니즘과 프로그램은 혼백처럼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는 유전자 설계도에 의해 제작된 고가의 시디플레이어
        수많은 데이터를 읽어들여 그 누구를 위해 연주하다가 픽업의 수명이 다해간다
        벨트드라이브의 구동이 느슨해져간다
        데이터를 읽었으나 음악으로 변환하는 목청이 메말라간다
        메이커들은 새 기능과 설계에 의한 시디플레이어를 세상에 내보낸다
        20비트에서 24비트로
        32비트로 처리되는 프로세서를 새롭게 개발한다
        유물이 된 낡은 기기는 제 역할을 끝내고 폐품으로 실려간다

        음악에의 사랑만 허공에 메아리로 남는다    


[감상]
<시디플레이어>의 고장을 우리 몸의 현상으로 풀어낸 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부정적 측면은 기계가 우리의 삶을 철저히 예속시켜, 결국에는 인간이 기계프로그램에 종속되는 암울한 미래를 예상케 합니다. 이렇듯 시인의 상상력은 신조차 <메이커들>로 비유해 인간진화를 생산의 개념으로 직관해냅니다. 늙어 병약해지는 몸이 <폐품>처럼 사라져가도, 우리의 영혼에 배어 있는 음악 같은 것, 사랑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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