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국도> / 김왕노/ 《현대시학》2005년 8월호
푸른 국도
길가의 집 앞에 기다림이 쪼그려 앉아 하염없는데
끊길 듯 끊길 듯 필사적으로 뻗어간 이 길
길을 오가며 보던
차창에 비치던 옛 얼굴을 어디서 미라같이 쪼그라들고 있는지
길은 블랙홀로 자꾸 나를 빨아들이고
나는 소실점 하나로 길 위에 남았지만
그래도 사고다발지역을 지나면서
이 곳에 이르러서 불행해진 사람을 위해 성호를 그으면
폐가가 있는 길가의 쓸쓸한 풍경이 담뱃불 같이 잠시 환해진다
옛날 푸른 등같이 사과가 매달렸던 길가의 과수원이 사라졌는데
탱자 꽃 하얀 관사의 오후도 사라졌는데
아직도 길 위에 자욱한 사라지는 것들의 발소리
그래도 사라지는 것들을 배려해
누가 켜준 저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몇 눈금의 목숨을 길 위에 써버리더라도
안개 피는 새벽쯤이면
이 국도 끝 그리운 집의 문을 소낙비 같이 세차게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감상]
새벽, 반쯤 열린 창문 속 담뱃불, 그리운 집, 속도가 만들어낸 소실점… 우리가 그동안 생각 없이 지나쳤던 국도를 이 시는 <푸른>이라는 어휘로 환해지게 만듭니다. 길 위의 풍경들은 집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의 <과수원>과 <하얀 관사>는 체험된 기억이고 실체를 갖지 않은 부재의 징표입니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반드시 거쳐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는 육신이 되고, 휘발유는 <몇 눈금의 목숨>이 되어 길 위의 것들과 실존케 하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