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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벗는다 - 이은림

2005.07.07 12:32

윤성택 조회 수:1505 추천:202

<날마다 벗는다> / 이은림/ 《작가세계》2003년 겨울호


  날마다 벗는다

  퇴근길,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내게 매달렸거나 붙어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차례차례 벗어 던진다 블랙 구두(지독히도 질긴 길들이 붙잡고 놔주지 않던 것, 냄새나는 발자국들을 끊임없이 토해내던 썩은 가죽관 두 짝) 올 나간 살색 스타킹(두 다리를 통째로 삼키고 있던 길쭉한 주둥이) 회색 주름스커트(형편없는 연주만 흘리는 고장난 아코디언 같은) 화이트 블라우스(펄럭이는 피와 정맥과 근육들을 사정없이 눌러대기만 하던)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브래지어와 팬티(꽃잎만이 아니라 가시까지 생생히 수를 놓았군) 적당히 매끄러운 피부(너무 오랫동안 나를 가둬놓고 확장해가던 얇디얇은 감옥)까지 벗어버리고 나니 모빌처럼 휘청거리는 뼈들, 실컷 가벼워진 나는 그제야 방으로 간다 딱딱한 웃음 들고 오동나무 침대가 있는 다락방에 오른다……,

  다시 아침, 햇볕의 넝쿨손들이 먼저 더듬고 있는 내 몸 여전히 내게 입혀져 있다 참을 수 없는 이 거추장스러움 불치의 몽유병이 내 안에 거주한다!

 
[감상]
먼 꿈속에서 돌아온 우리는 몸을 입고 옷을 입고 하루를 맞이합니다. 이 시는 이처럼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거추장스러움을 보여줍니다. 기실 그 거추장스러움은 가식과 허위에 얽매여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겠지요. 벗는 것에 대한 점층적인 변화가 관음을 자극하는 듯싶지만, <모빌처럼 휘청거리는 뼈들>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에서 뭐랄까 시원한 해갈을 느낍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걸쳐야 합니다. 벗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운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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