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 이병률 / 2005년 《서정시학》여름호
사랑의 역사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 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만하면 받치고 굳을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감상]
우리 몸의 심장은 왼쪽에 있습니다. 심장을 긁히듯 몇 번의 사랑이 다녀간 것일까. 인연이다 싶어 건넸던 마음이 상대에 의해 무색해지던 그 너머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잠시, 아니 오래라고 믿는 진실한 사랑. 그러나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또한 <내 소관>이 아닌 것은 운명과도 같은 느낌이겠지요. 사랑하게 되면 나타는 증상, 그리고 땀에서 느껴지는 페로몬. 이 시는 이러한 <사랑>이라는 관념을 구체적인 일상으로 빗대어 빼어난 비유로 풀어냅니다.
왼편 심장에 줄긋기를 여러번...
사랑도...인연도
마음대로 안된다고 깨달았을 때
뼈는 금이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심장은 처음처럼 뛰고...
내 몸에서는 아직도 여름 냄새가 그윽합니다
지금까지 사랑했던...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름들을 불러모아 봅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심장뛰는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왼쪽 벽에 긁힌 자국이 아팠지요
사랑은 연습으로 단련 되어지는 것이 아닌가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