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 아침에 가늘게 날리던 눈이 오후의 문턱을 넘어 쏟아져 온다. 가볍게 흔하게, 흰빛이 내려앉는다. 나뭇가지에도, 거리 간판 모서리에도, 문 닫힌 셔터에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니 눈발이 더디게, 그러나 꾸준히 들이친다. 안경 속까지, 눈을 감았다 다시 뜬다. 이제야 오후가 온전히 오후 같아진다.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으면 눈발 사이 너머로 아득한 게 보인다. 마치 내 안의 시력이 한 단계 더 환해지는 느낌. 희고 투명한 것들이 영사기의 환등처럼 밝아온다. 먼 과거까지. 문득, 눈이 호강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정말 그렇다. 이렇게 순전한 빛의 입자가 시야를 가득 메울 때, 보는 일 자체가 호사스럽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오후. 무언가를 누린다는 감각은 대개 손으로 쥐거나 입으로 맛보거나 몸으로 부딪히는 데서 오지만, 지금은 오직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눈[目]이 눈[雪]으로 포만한 오후.
눈발을 관람하듯 걷는다.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대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사람들 머리에 쌓였다가 흩어지는 눈가루를, 공중에서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틈을 내어 내리는 질서를. 코를 찡긋하면서도 보는 것이 좋다. 마음속 바닥까지, 언제부터인가 채워지지 않았던 빈자리가 천천히 메워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것은 초봄 내리는 눈발이 약속한 유희일지도. 이렇게 흰 풍경 속에서, 감각의 순도를 넘겨가는 것. 무언가를 더 느끼고, 더 깨닫고, 더 천천히 바라보는 것.
일을 마치고 나와 눈이 쌓여 있으면, 오후가 길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시간은 변함없는데, 생각이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창밖을 가득 채운 흰 세계가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만드는 걸까. 시곗바늘은 제 속도로 가고 있지만, 마음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여기에 쌓이는 눈은, 세상의 템포를 조용히 늦춘다. 거리도, 걸음도 다 슬로우모션이다. 마치 오후 한가운데, 모든 것이 조금씩 시간을 헐어가는 느낌. 그렇게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더 깊고, 더 충만하게.
눈이 오면,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본 눈, 가장 행복했던 눈, 가장 외로웠던 눈. 유년의 기억 속 고열을 앓던 밤의 아스피린 가루로 내리는 눈. 눈송이가 손바닥에서 한 방울 습기가 되어 내게 스며들던 어린 날. 그때의 감성이 지금에 와 닿았을까. 그때의 마음은 지금과 이어져 나를 데려갈 수 있을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눈발을 따라 흐릿하게 돌아오는 것만 같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녹았다가 다시 얼고.
눈이 호강하는 오후. 나도 덩달아 호강한다. 건물 아래 서서 주머니에 손 넣고 무심히 들여다보는 순간. 그저 눈을 눈으로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도 괜찮은 공간. 모든 것이 흰빛 세상으로의 소거.
이 오후를 오래 누리고 싶다. 가능한 한 오래, 깊이. 눈이 녹아 사라지기 전에, 지금 이 감각을, 오후를, 눈을,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