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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길렀다. 한동안. 천천히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늘 그렇듯 지루하면서도 묘한 위안을 주었다.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감지하려면 일명 거지 머리를 건너는 인내가 필요했다. 조금씩 자라는 머리칼을 얇은 핀으로 꽂으며 어색한 단계를 넘겨 갔다.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 묶었다. 뒤로. 그 순간, 나는 일 년을 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울을 볼 땐 뒤통수를 살폈다. 달라진 건 머리카락을 묶은 것뿐인데, 모든 것이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경계가 생긴 것 같았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는 무언가를 가르고 있었다. 이전과 이후를. 아득하게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하나로 모였다. 한 올 한 올 정리되었다. 단단한 매듭처럼.

 

이제는,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헝클어지지 않는다.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사소한 불안도, 잡념도 줄어들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얼굴에 들이치던 머리칼이 사라진 만큼, 나를 숨겨 주던 것도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나를 스스로 감싸는 방식이 달라졌다.

 

머리를 묶고 보니 이제는 숨을 곳이 없다. 온전히 나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만큼, 표정도 더 책임이 생긴 듯하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야 했다.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추는 일이 마땅한 예의인 듯이.

 

왼 손목에 머리끈 두르고 뒤통수에서 머리카락을 그러모은다. 손에 걸린다. 타이트한 그 감촉. 매듭을 조이면 내 안에서도 생각이 조여졌다. 흐트러질 수 없는 상태.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둔 감각. 어쩌면 나는, 매일 같이 나를 매듭짓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태도를, 시선을. 단단하게 조여 두고 있었다. 풀릴까 봐 조심스럽게. 느슨해질까 봐 긴장하면서.

 

하지만 때때로 풀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너무 조여서 답답하고 때론 몇 올이 뜯길 때마다. 자기 전 머리끈을 푼다. 하루 동안 머리끈 작은 동심원에 들어찬 것들이 풀린다. 머리카락이 묶인 대로 휘감겨 있다 늘어진다. 해방감. 혹은 적막감.

 

한데 뭉쳤던 것들은 어쩌면 하루 동안 나를 지탱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에 나는 흐트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고. 이런 도덕적인 말들로 나를 다시 묶어낼 수 있다고. 일생을 통틀어 가장 긴 머리의 한때가 지나고 있다. 돌이켜 본다. 왜 그토록 지저분해 보이는 더벅머리를 버텨왔는지. 결국, 내가 길러온 것은 머리일까 신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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