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듦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단어가 원래부터 있었던가. 아니, ‘들다’를 명사화한 것이던가.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낯설지 않다. 삶이란 결국 어딘가로 들어가는 일,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는 과정일 테니.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뒤이어, 어디로 드는가, 하는 물음표.
살아 있는 동안 무수한 문을 드나든다. 집으로, 일터로, 식당으로, 버스로, 기차역으로. 때론 누군가가 이미 기다리는 공간으로, 때론 꽉 찬 어둠 속으로. 문을 넘을 때마다 문이 나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하지만 모든 문이 그렇게 쉽게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문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이고, 어쩔 수 없이 돌아서기도 한다. 문이 닫혀 있거나,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거나, 그곳이 더 이상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닐 때. 그렇다면 삶이 듦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허용되는 듦이어야 할까. 혹은 그저 들어서려는 과정만으로도 듦이 될 수 있을지.
들어갔다 나오는 일도 있다. 간이역 안을 지나 바닷가로, 나뭇가지 끝을 지나 망울로. 한동안 자리 잡은 공간에서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도 듦의 한 형태인지. 들어갔다고 해서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수 없듯이, 나왔다고 해서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닐 것. 그럼에도 머물렀던 자리에는 무언가 남는다. 머리카락 한 올. 향기. 접착력이 사라진 포스트잇 같은 것. 그러니 떠남 역시 듦과 다르지 않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의 듦으로 이어지는.
하지만 어떤 문은 갑작스럽게 닫힌다. 들어가려던 순간 닫혀버린 문 앞에서 내밀었던 손을 어쩔 수 없이 거둬들인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문을 열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친다. 어떤 이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어떤 이는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부술 듯이 두드리는 이도, 조용히 떠나는 이도, 결국 같은 질문을 떠올릴 것이다. 문은 벽인가, 포용인가. 당신의 마음인가.
그럼에도 문은 계속 사람을 찾는다. 삶이 듦이라면, 그 듦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는 발을 들일 마지막 문이 있을 것이다. 그 문이 어떤 모양일지, 무엇으로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삶이 듦이라면, 죽음 또한 하나의 듦인 것은 분명하다. 완전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어디론가 들어서는 일. 그렇다면 죽음을 열고 다시 삶에 들어설 수 있다는 건가. 다만 끊임없이 어디론가 들어가고 있는 것뿐일까.
어쩌면 몸 또한 하나의 문으로 일생을 드나들게 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어오고 사랑이 나가고 고독과 비애가 자리를 맞바꾸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서서히. 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