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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은 거칠 질감의 객차 안을 번져내고 있다. 잠시 존 것 같은데 예닐곱 개의 역이 화풍처럼 지나갔다. 마치 나를 스쳐 간 마음에서 머물다 온 것 같은. 그 여운으로 전철은 속도를 늦춘다. 매일 지나는 이 길이 어쩌다 이토록 생소한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감정이 내게 깃들다 가는지.
졸음은 어쩌면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의식 바깥으로 쓸어낸 감정들을 부유하게 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건너편 무표정한 얼굴에서 순간 웃음이 서렸다 사라진다. 휴대폰 속은 또 다른 낯선 정거와 같아, 말 없는 차내가 무의식처럼 덜컹거리며 밤을 고르고 있다. 무수한 이들의 생이 몇 정거장에 걸쳐 겹쳐지고, 또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이 한때. 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느 날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차창에는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숨 쉬었던 잔흔일 것. 모두가 깃들다 지나간 자리. 그 위로 먼 가로등 옅은 빛이 번진다. 도시는 멀고 창백하며 불빛들은 간신히 떠오른 누군가의 상념처럼 아슬아슬 반짝이고 있다. 어느덧 하루는 이렇게 또 기우는 것. 또한 이 하루가 나를 잊어가는 것.
무언가에 이끌리듯 건너편 차창을 응시하다 보면, 문득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비치기도 한다.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어디로든 떠나가 버리는 삶.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삶. 겸허하게 세상의 남루를 입어 보는 삶.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다. 결국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더 멀리서 자신을 만나 역할을 바꾼다는 것을. 전철 좌석에서 이리도 내가 낯설다니.
다시 속력 안에서 눈을 감는다. 졸다 깨었을 때 느꼈던 현실이 이제 익숙한 감각으로 떠나고 있다. 나는 낯선 순간 속에서 숨을 고르다 ‘나’라는 자각을 벗어난다. 내릴 역이라는 방송에서 눈이 번쩍 떠질 때까지, 나는 한때 나였던 밤들을 지나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