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의자 - 안시아

2003.12.24 13:37

윤성택 조회 수:1357 추천:177

「의자」/ 안시아 / 『시작』2003년 겨울호



        의자

                
        바닷가 선창,
        다리 하나 부러진 의자가 있다
        거뜬히 서 있을 수 있다는 듯
        세 개의 앙상한 다리만으로도
        텅 빈 허공을 버티고 있다
        다리를 잃은 후 스스로 버려져
        이곳까지 떠나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자는 어느 곳 하나
        은밀한 곳이 없다 오직
        버티기 위해 살아왔을 뿐,
        그 꼿꼿한 중심이 평생 의자를
        의자로만 눌러 앉힌 것이다  
        의자에 앉아본다
        으랏차차! 무게중심이 급기야
        잃어버린 다리 쪽으로 엉덩방아를 찧게 한다
        멍울진 자리 덮어주던 파도가
        흠칫 놀라 한 걸음 밀려나간다
        이제 의자의 중심은
        그 위에 앉는 엉덩이의 몫이다
        스스로 중심을 잡는 사람만이
        의자를 쓰러뜨리지 않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 전 언제 한번
        의자를 배려한 적 있었던가
        다시 의자를 세워 놓는다
        다리가 세 개이고도 여전히 의자인 의자 하나가
        부러진 다리의 무게중심을 서로 나눈 채
        바닷바람을 버티고 있다
        의자가 걸터앉은 백사장을 보라
        중심 없는 것들만 휩쓸려 다닌다
        


[감상]
버려진 의자에 대한 사색과 탐구, 또한 자기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솜씨가 좋은 시입니다. 의자에 대한 '배려'를 생각해내는 것이나, 중심에 대한 고민 끝에 '중심 없는 것들'과 변별되는 삶을 넌지시 꾸짖는 결미가 좋습니다. 시적 대상을 관찰하거나 소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화자인 나를 등장시켜 활동케 하는 것도 정적인 흐름에 활기를 불어넣는 시도일 것입니다. 혹시 나는 다리가 세 개인 의자만 탓하며 중심 없이 흘러온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의 절반을 의자에 받쳐 살면서, 그 중심을 모른 채 때론 개처럼 다리를 떨면서.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51 거울 속의 벽화 - 류인서 [1] 2004.01.09 1112 193
550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7 187
549 뜬 눈 - 김연숙 2004.01.07 1130 201
548 2004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4.01.05 2050 195
547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2004.01.05 993 210
54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545 바람의 초상 - 전정순 2003.12.31 1157 195
544 텔레비전 - 서정학 2003.12.30 1290 228
543 누구의 아픈 몸속일까 - 이나명 2003.12.26 1277 209
» 의자 - 안시아 2003.12.24 1357 177
541 첫사랑 - 이윤훈 2003.12.23 1573 196
540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539 126번지 - 이승원 2003.12.19 1061 174
538 도시생활 - 설동원 [1] 2003.12.18 1108 182
537 불면 - 조정 [2] 2003.12.17 1396 209
536 포구의 풍경 - 강수 2003.12.16 1184 174
535 별 모양의 얼룩 - 김이듬 2003.12.15 1516 183
534 성북동 국밥집 - 정진규 2003.12.13 1182 179
533 음풍 - 박이화 2003.12.12 1016 201
532 오래된 엽서 - 안상학 2003.12.11 1281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