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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5:22

윤성택 조회 수:1047 추천:187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창비시선》




드라큘라


  마늘도 연탄도 부족하고 십자가도 드물던 시절,

  넓은 마당 한 구석에 관 짜는 집이 있었다 옻칠한 관이 틀니처럼 가지런
히 쌓여 있던 곳, 늘 어두워 지나는 이가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곳, 거기가
적금 붓듯 오래된 과거를 쟁여 넣는 데라는 걸 내가 알았을 턱이 없다

  내가 좋아한 것은  대패가 나무 위를 건너가는,  그 사각사각 하는  소리,
대패가 엿판을 지나갈 때 엷게 저며져 나오는 엿처럼 달콤하고, 이태리타
월이 살결을 지나갈 때 검게 줄 지어 나오는 때처럼 시원한 그 소리,

  거기가 곗돈 붓듯  오래된 미래를 모아두는 데라는 걸  내가 알았을 턱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오후 2시에서 3시까지 좁은 창문을 넘어오던 깡마른
햇살, 햇살을 타고 먼지가 되어 날아오른 할머니, 용구 아빠와 용구,

  그이들은 그리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 밤이 되면 기
지개를 켜고  일어나 비죽 나온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을까  틀니처럼 반
짝이는 웃음을 웃지 않았을까 대패 지나는 소리로 서걱서걱,  얘기를 나누
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그곳을 떠난 후 관 짜는 집도 사라졌다 할머니도 선산으로 떠나시
고 용구도  제 아빠를 무동타고 어딘가로 이사 갔다  지금 서울엔 마늘시세
가 똥값이다  연탄은 때지 않지만 십자가는 동네마다 있다  그리고 나는 아
파트에 산다

  그분들처럼 이 동네 사람들도 밤이 되면 층층이, 나란히, 눕는다


        
[감상]
관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 시입니다. 그리고 아파트를 또 하나의 관으로 비유한 마지막 부분은 진중한 주제적 흐름을 뒷받침해주고요. 유년의 생각이 그대로 시적 상상력으로 풀이되는 5연이 인상적입니다. 그리하여 도시 관짝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드라큘라일지 모릅니다. 아파트에서 지하철로 건물로 햇빛 밖으로 숨어든,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자신과 가장 멀리 올려놓고 그 아래 숨어서 사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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