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초상」/ 전정순 / 『작가세계』2003년 겨울호, 신인상 수상작 中
바람의 초상
-시인
맨발로 불을 디디고 맨발로 물 위를 걷는다 노래로 풀씨를 잠재우고
노래로 초록을 일으킨다 프리지어를 다듬던 길고 흰 손으로 시궁창
썩은 웅덩이를 어루만지는 그대, 그대는 세상의 향기와 세상의 악취
를 한데 섞는다
교회 지붕 위 시멘트처럼 웅크린 비둘기들에게 일일이 날개를 나눠
주며 지나가는 자동차 유리창에 붉고 노란 단풍잎 스티커를 붙여주기
도 한다 심심한 날이면 쓰레기 소각장 높은 굴뚝 위에 여러 개 뭉게구
름을 갈아끼우고 백양나무숲까지 반짝이는 강물을 끌어당긴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거리의 셔터들이 하루를 끌어내리는 늦은
저녁 그대는 취한 사내의 비틀거리는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두 손을 오므린다 집이 없는 그대는 집이 없는 사내와 어깨를 겯고 어
두운 거리를 걸어간다
[감상]
바람처럼 떠도는 것이 이 생의 삶일까요. 맨발로, 초록을, 프리지어를, 시궁창을 만지며 살아간다 한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싱싱한 비유가 들어 있는 2연이 좋군요. 시인이 되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걷다가 본 것들을, 당신에게 색안경에 비친 대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집이 없으니 늘 떠나야하고 늘 걸어야겠지요.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길은 더 이상 새길을 내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 올해의 마지막 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