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눈」/ 김연숙/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뜬 눈
지구의 역사이래
뿌려졌으나 움트지 않은 씨앗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을까
수천 년 전 고분에서 출토된 씨앗들도
아직도 살아 싹을 틔운다는데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에도 지표 아래엔
썩지 못하는 수천 수만의 씨앗들이
눈을 뜨고 형형히 밤을 밝힌다
잠시 눈을 감고
뛰어내리듯 나를 놓으면
이윽고 발열하고 욱신욱신
지표 위로 솟아오르고
더 많은 내가 되어 온 들판 덮었을 터
껍질을 벗고 나온 새 여름의 숨결들이
온 땅을 감쌌을 터
자연의 구슬림보다 질긴
낟알의 고집
수천 번의 봄기운으로도 회유하지 못한
미전향 장기수처럼
오늘밤에도 검은 흙 속에서 들려온다
나는 나야---
일제히 눈을 뜨고
불 밝히고 기다린다
[감상]
도시의 불빛을 '썩지 못하는 수천 수만의 씨앗들'들로 인식의 전환점을 만든 시입니다. 발아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언가 찢고 나오지 못한 영혼들이 불빛인 셈입니다. 이러한 '움트지 못하는 씨앗'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지만, 시인은 이런 '타고난 운명'에 대해 온몸으로 맞서는군요, '미전향 장기수'처럼. 이 결연한 직유가 눈을 번쩍 뜨게 만듭니다. 나는 나야--, 도시의 불야성이 그러하듯 익명성과 군중의 무리에 갇힌 자아가 부르짖는 불빛, 캄캄한 바다를 표류하다 발견한 등대 같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