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뜬 눈 - 김연숙

2004.01.07 11:43

윤성택 조회 수:1130 추천:201

「뜬 눈」/ 김연숙/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뜬 눈       
        
        지구의 역사이래
        뿌려졌으나 움트지 않은 씨앗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을까
        수천 년 전 고분에서 출토된 씨앗들도
        아직도 살아 싹을 틔운다는데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에도 지표 아래엔
        썩지 못하는 수천 수만의 씨앗들이
        눈을 뜨고 형형히 밤을 밝힌다
        
        잠시 눈을 감고
        뛰어내리듯 나를 놓으면
        이윽고 발열하고 욱신욱신
        지표 위로 솟아오르고
        더 많은 내가 되어 온 들판 덮었을 터
        껍질을 벗고 나온 새 여름의 숨결들이
        온 땅을 감쌌을 터
        자연의 구슬림보다 질긴
        낟알의 고집
        수천 번의 봄기운으로도 회유하지 못한
        미전향 장기수처럼
        오늘밤에도 검은 흙 속에서 들려온다
        나는 나야---
        일제히 눈을 뜨고
        불 밝히고 기다린다
        


[감상]
도시의 불빛을 '썩지 못하는 수천 수만의 씨앗들'들로 인식의 전환점을 만든 시입니다. 발아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언가 찢고 나오지 못한 영혼들이 불빛인 셈입니다. 이러한 '움트지 못하는 씨앗'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지만, 시인은 이런 '타고난 운명'에 대해 온몸으로 맞서는군요, '미전향 장기수'처럼. 이 결연한 직유가 눈을 번쩍 뜨게 만듭니다. 나는 나야--, 도시의 불야성이 그러하듯 익명성과 군중의 무리에 갇힌 자아가 부르짖는 불빛, 캄캄한 바다를 표류하다 발견한 등대 같다는 생각.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51 거울 속의 벽화 - 류인서 [1] 2004.01.09 1112 193
550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7 187
» 뜬 눈 - 김연숙 2004.01.07 1130 201
548 2004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4.01.05 2050 195
547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2004.01.05 993 210
54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545 바람의 초상 - 전정순 2003.12.31 1157 195
544 텔레비전 - 서정학 2003.12.30 1290 228
543 누구의 아픈 몸속일까 - 이나명 2003.12.26 1277 209
542 의자 - 안시아 2003.12.24 1357 177
541 첫사랑 - 이윤훈 2003.12.23 1573 196
540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539 126번지 - 이승원 2003.12.19 1061 174
538 도시생활 - 설동원 [1] 2003.12.18 1108 182
537 불면 - 조정 [2] 2003.12.17 1396 209
536 포구의 풍경 - 강수 2003.12.16 1184 174
535 별 모양의 얼룩 - 김이듬 2003.12.15 1516 183
534 성북동 국밥집 - 정진규 2003.12.13 1182 179
533 음풍 - 박이화 2003.12.12 1016 201
532 오래된 엽서 - 안상학 2003.12.11 1281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