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 다른 글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모처럼 윤시인의
홉을 찾아와서도 그냥 안부의 말을 던지기가 쑥스럽네요. 윤시인의 홈을 방문한 흔적으로 cy-pen에
올린 짧은 글을 내려 놓고 갑니다.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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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가 그린 여섯 켤레의 구두
나에게 7월은 고호의 달이다.
그가 1890년 7월 29일 권총자살을 했다는 것도 내가 7월을 고호의 달로 정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고호가 나에게는 통과의례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이다.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통과하며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
에 한 번쯤은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요즘에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인터넷 시
대를 맞이하여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홈페이지에 고호의 그림을 올려 놓
은 것을 보았다. 고호와 그의 그림은 지금도 숱한 젊은이들에게 통과의례의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젊음은 확실히 밝고 환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누구든 그 젊음을 통과할 때
에는 아주 짙은 잿빛을 보게 된다. 과거보다는 미래의 크기가 훨씬 큰 시기인
데도 자신의 미래를 밝고 환하게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정체불명의 불안과 두려
움, 회의를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밝음보다는 어둠이
더 많이 느껴지는 시기에 고호의 그림은, 그리고 그의 암울했던 삶은 아주 강
한 힘으로 공감을 강요하였다. 뭉크의 그림도 그랬지만 고호의 그림은 오래도
록 나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해의 7월, 무섭게 더운 날에도 많은 학생들은 군화를 신고 다녔다. 그들
은 검게 물들인 군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그날도 나는 날씨가 더워 군화
의 앞을 열어 놓은 채 무거운 군화를 질질 끌고 다녔다. 바로 그날 나는 명동
유네스코 회관 옆의 좁은 골목 안에 자리잡은 작은 서점에서 고호의 화집을 샀
다. 일본에서 만든 고호의 화집 안에는 고호가 그린 낡은 구두 그림이 여섯 작
품이나 실려 있었다. 내가 신고 있던 군화와 너무나도 닮은 그림 속의 낡은 구
두를 나는 아주 오래도록 보고 또 보았다.
며칠 후 나는 하이데거가 고호가 그린 그 구두그림을 가지고 사물과 예술작
품의 대상 사이의 관계,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이야기한 글을 읽었다. 하이데
거의 글과 고호의 그림, 그리고 내가 신고 있었던 낡은 군화가 하나로 겹쳐졌
을 때 나는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커
다란 영감이 되었으며 나의 눈을 조금 더 넓게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하이데거의 글과 고호의 그림, 그리고 나의 낡은 군화를 하나의 지평에 올려
놓고 계속 "그랬구나, 바로 그것이었구나"하는 소리를 외쳤다. 깨달음의 순간
에 느껴지는 그런 희열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었다.
나는 자주 고호의 구두 그림을 보았고 그 때마다 작지만 아주 중요한 깨우침
을 얻었던 그 순간의 기쁨을 되삭임질 했다. 그 해 7월 나로 하여금 짧은 순간
이나마 밝은 섬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고호의 구두 그림을 나는 지금도 잊
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