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접속하는 공간입니다.
"로그인하라!"는 명령에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 말이 너무 강압적으로 다가와서가 아니라
기억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디랑 패스워드가 뭐였지...'
잠시 고민하다가,
멍청스런 머리를 한탄하다가,
포기하려다가,
이것저것 아무거나 넣어보았습니다.
은행처럼 "3번 실패"라는 것이 없어서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잘 살고 계시죠?
저 또한 잘살고 있어요.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루 3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잘살고 있어요.
아직까지 이런 고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참 이상하죠?
시력은 시간이 지날 수록 흐려지는데,
사회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선명해 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뭉개져 있던 사회 모습이 이제는 또렷하게 다가와요.
서로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더욱 침전되면서
사라지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옮겨 놓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 공간은 잊게 되고...
그래서 "분화"라는 단어가 소중하게 생각되는 요즘이지요.
예전에는 경제학 안에서만 생각했었는데...
사회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분업이었잖아요. ^^
괜히 일하기 싫어서 말이 길어지네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런 날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한겨레21" 474호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
"전화국이여, 계약직 노동자여!"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전설 홍준표씨, 그 앞에서 함부로 '투쟁'을 논하지 말라
방방곡곡 전화국 계약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강고하게 싸운 홍준표씨
사람이 소파에 앉은 채 이렇게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며칠째 여의도에서 폭우를 맞으며 노숙농성을 벌이다 잠시 짬을 내 사무실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던 홍준표(42)씨가 얼마나 달게 잠에 빠졌는지, 차마 깨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을 먹은 뒤에야 홍씨와 마주 앉았다.
필자와의 안타까운 기억
누나, 매형, 고모부, 사촌형제들이 모두 한국통신에서 일하는 ‘한국통신 가족’에서 자란 홍준표씨가 1982년 10월 한국통신 협력업체에 취업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전자식 교환기가 도입되면서 전화들이 한꺼번에 개통돼 물량이 폭주했어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일했지요. 그러다가 1995년 가을 한국통신에서 도급업체에 맡겼던 일들을 모두 직영으로 바꾸면서 가설공들이 모두 한국통신 계약직 신분이 됐어요. 협력업체 소속일 때는 한달에 250만원 정도 벌었는데 한국통신 직고용이 되면서 고용안정을 핑계로 160만원으로 임금을 낮추더군요.”
IMF 구제금융 태풍을 맞더니 그 임금이 한달 94만원으로 또 삭감됐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계약직도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회사의 요구였다. 몇달만 그렇게 견디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던 임금은 1997년이 되자 다시 한달 85만원으로 깎였다. 경력 20년 가까이 된 선로가설공들이 상여금 한푼 없이 한달 85만원을 받았다. 그래도 회사의 약속을 믿고 빚내가며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계약해지가 통보됐다. 회사 인원을 줄이는 구조조정 방침이 정해졌으니 계약직부터 우선 나가라는 것이다.
“관리자들에게 여러번 얘기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가까운 곳에 있는 전화국 계약직 노동자들부터 만나기 시작했지요. 본격적으로 조직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부터였어요. 하 소장님 만난 것도 그 무렵인데, 소장님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까운 기억을 갖고 있어요. 충북 칠갑산 근처 학교에서 우리가 모였을 때, 차 끌고 거기까지 혼자 오신 분에게 차비라도 좀 드렸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 칠갑산 기슭에 있는 작은 분교에서 모임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물어물어 그곳까지 찾아갔는데, 운동장 한 귀퉁이 맨땅바닥에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어두운 얼굴로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아, 나는 그래도 교실 한칸이라도 빌렸는 줄 알았지.” 그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목이 잠겼다.
전국 수백개 전화국마다 적으면 10명, 많으면 100여명씩 흩어져 있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그렇게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불러모은 사람이 바로 홍준표씨다. 가장 조직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탄생된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은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강고한 투쟁을 벌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싸움을 다 했다. 길거리 노숙농성, 한강다리 고공농성, 세종문화회관 옥상 기습시위, 목동전화국 점거농성, 국회 농성, 그 밖의 수십 차례가 넘는 타격투쟁과 집중투쟁…. 홍준표씨는 위원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투쟁을 이끌었다.
‘이 동지를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이야기를 하면서 정규직 노동조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2000년 12월18일 명동성당에서 파업투쟁을 시작했을 때, 이미 400명 가까운 계약직 노동자들이 명동성당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는 회사에서 정규직과 똑같은 사무실과 같은 옷장을 사용하고 같은 전봇대에 올라가고 회식도 같이 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구별 없이 일하다가 ‘파업한다’고 하니까 당연히 함께하는 줄 알고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상경투쟁 지침을 내려 전국에서 올라온 한국통신 계약직만 930명이었어요. 정말 이번에는 한국통신 거대자본과 한바탕 싸울 수 있겠다고 모두들 기대했습니다. 정규직 노조 간부에게 확답도 받았고…. 그런데 같이 싸울 수 없으니 나가라고 했을 때, 그때 저 울었습니다. 그 분노는 정말 엄청났어요. 노동자끼리의 대결 구도로 갈 수도 있었지만, 큰 뜻을 위해서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참았습니다.”
그 며칠 뒤,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은 우리 연구소에 전화를 하더니 “한강다리 위에 올라가 몇m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야 집시법에 저촉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4차 상경투쟁을 벌이던 이동구 동지가 추위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어요. 그 다음날, 한강대교 고공농성을 결정했지요. 며칠 동안 노숙농성을 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모여서 30만원을 내고 보일러를 땠어요. 얼었던 몸들이 녹으니까 조합원들이 윗옷 벗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정신없이 자는 거예요. 전봇대 오르내린 경험이 많은 조합원 다섯명이 한강대교 위에 올라간다고 결정은 했는데, 누가 할 것인지는 위원장이 정하기로 했거든요. 새벽에 강당으로 내려가 정신없이 자고 있는 이창기 동지를 흔들어 깨웠어요. ‘창기야, 한강다리에 올라가는 고공시위를 하기로 했는데, 네가 올라갈 수 있겠냐?’ 이창기 동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위원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당연히 올라가야죠.’ 바로 자리 털고 짐 챙겨서 따라오는데, 그때는 정말 ‘이 동지를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각마다 ‘구리스’가 잔뜩 발라져 있어 지도부는 철수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창기씨는 한강대교 아치 위로 올라갔다. 둘둘 말아 어깨에 둘러맨 현수막을 내려뜨렸지만 강풍 때문에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이씨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현수막 양쪽 끝에 묶었다. 기온은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졌고 기자들이 올 때까지 그 위에서 한 시간 동안 철판에 쩍쩍 달라붙었던 이씨의 발은 동상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성질 급한 내가 이야기를 듣다가 “목동전화국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거냐?”고 닦달했다.
“이제 옥쇄투쟁을 각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5년쯤 징역 살 각오 했다’고 말하고 토론을 거쳐 투표를 했는데 조합원들이 94%의 찬성으로 전화국 점거농성투쟁을 결정했어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하기 쉬운 투쟁이어서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한조에 5명씩 편성하고 휴대전화는 조장만 빼고 모두 반납했어요. 느닷없이 ‘몇시, 어느 전화국 정문’ 지침을 내려 타격투쟁하고 흩어지는 훈련을 한달 동안 수시로 했어요. 날짜는 결행 직전까지도 말하지 않았어요. 2001년 3월29일, 조합원 40명이 대방전화국으로 위장투쟁을 가고 본 대오는 오목교 근처 공원에 집결했다가 새벽 3시 조금 지나서 목동전화국으로 들어갔어요. 선봉대 15명은 그 전날 미리 들어가 화장실에서 15시간을 숨어 있었어요. 그날 농성 5시간 반 만에 모두 연행된 인원이 언론에는 197명으로 나왔지만, 천장에 숨어서 이틀을 버틴 조합원들도 있고 그렇게 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실제 들어간 인원은 250명이었어요. 4월이 다 됐는데 눈은 또 왜 그렇게 펑펑 내리는지….”
홍준표 위원장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하나 정도는 소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홍씨는 지금 민주노총을 이끄는 부위원장이다.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 조직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의 기득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는 것으로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희망으로 보듬어야
“우선 실제 상황이 언론보도나 사람들의 짐작과 많이 다릅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투위 돕기 1일호프 표 팔러 갔을 때, 정규직 노동자들이 3천장을 앞다퉈 사줬어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적인 일들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깨닫는 활동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노동자와 국민들이 ‘비정규직 문제는 내 문제, 내 가족의 문제다’라고 깨닫는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그날이 과연 올까? 의문을 품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규하는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의 편이구나. 학교 때도 늘 불의에 앞장서더니... 그게 투쟁의 힘이라는 것이 아직도 온기로 느껴져. 재작년 처음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네가 여섯 번째로 축하인사를 건넸더구나, 아마도 이 홈페이지의 원로급 회원이 아닐까 싶네 ^^ 너도 잘 지내고... 추억이 무사하다는 것을 너를 통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