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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 잔

2021.06.22 17:58

윤성택 조회 수:150



재래시장 허름한 전()집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바람을 이뤘다. 저잣거리 같은 일상에서 삶틱한이라고 해야 할까. 몇 해 전부터 과음을 하지 않는다. 한때 철없이 소주 몇 병은 비웠던 걸 떠올리면 이제는 몸이 내 마음을 사린다. 가눌 수 없는 생각이 깊어져 비틀거리는 나를 받아주기가 어려웠던가 보다. 돌아보니 그 추억은 허기를 닮았다. 곰곰이 곱씹어 봐도 끼니를 허겁지겁 때우듯 지나쳐온 옛일이 허허롭다. 막걸리 따라놓은 대접의 테두리가 얽고 찌그러져 있다. 무수한 입술이 닿으면서 닳았다고 해야 하나. 산다는 건 오도카니 막걸리 그 탁한 빛깔로 가라앉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들이켜올지 모르는 그 언저리에서 텁텁한.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깍두기나 김치 안주로 끼니를 대신하기도 하셨다. 느긋하게 술이 올라오면 껄껄 웃으시곤 했다. 허연 난닝구 걸친 초등학생 아들 앉혀 놓고 저녁이 트로트풍으로 흘렀던, 꼭 한 번은 꺾어 부르곤 했던 노래.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몇 번은 더 불렀을까. 그렇게 낙천적인 여름밤이 있었다. 가슴에 묻어난 노랫말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날 밤 아버지 코고는 소리도 뽕짝이었을 터.

 

요즘은 한차례 소나기에도 구두 속 양말이 젖는다. 밑창을 꼼꼼히 살펴도 갈라진 데가 없는데 자꾸 물이 스민다. 구두가 나를 신고 다니다가 아무도 모르는 틈을 홀짝이는 걸까. 양말이 젖었으니 어디든 앉아 있을까 하고 올려다보니, 전집의 벽걸이 선풍기도 얼룩얼룩하다. 어쩌면 이 막걸리는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젖어 있는 걸 기다린 게 아닐까. 종종 시장을 지나치면서 중간 어디쯤 내가 무턱대고 앉아도 되는 단골집이 있다고 상상한 적 있다. 팔목의 시계가 나를 이리저리 이끌고 갔던 곳에서 문득. 선풍기는 연신 고갤 끄덕이며 후덥지근한 열기를 들어줄 테지만, 대답은 주인아주머니 도마질이 전부다. 몇몇 이름이 막걸리 희멀건 자국으로 입가에 남는 저녁 무렵, 휴대폰도 대리운전 안내 문자를 띄워주곤 한다. 챙겨줘서 고맙다, 안부란 잔 돌릴 때 손바닥으로 입술 댄 곳 쓰윽 문지르듯 건네는 게지.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말이 없으셨다. 아니 혼잣말 속에 들어가 먼 산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일하다 다친 허리 때문에 보름을 병원에서 입원하고 돌아오신 후였다. 병실로 아버지를 보러 갔을 때 창문 너머 흰 라일락에서 그윽한 향기가 가뭇없이 묻어났다. 바람이 휘휘 젓듯 돌아 나오는 병원 어귀에서 환자복 입은 아버지가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을까.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아버지는 막걸리를 말없이 드셨다. 보상, 위로 같은 말들이 망망한 그 저녁에 부유했던가. 그것들이 떠올라 텅 빈 시간 속을 먼지처럼 떠돌다 지금 내게 내려앉고 있다.


머무는 것보다 떠나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이 세상은 다만 과거 어딘가에서 빌려온 날을 갚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삶을 위해 애썼던 날들이 오늘은 왜 자꾸 태연해 보일까. 막걸리에서 세월맛이 난다고 머리를 갸웃했을 때부터 편의점 주류 냉장고를 자주 열어보게 된다. 왜 집 앞에 왔다가 뒤돌아서고 싶어지는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어느 모퉁이에서 한 번쯤 주저앉았던 거라고.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면서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난 정말 몰랐었네. 시원하게 목넘김 너머 알싸하게 섞이는 맛, 막걸리지. 삶은 그래야봐야 수수부꾸미 섞어 한 접시 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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