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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한 옷이 늦은 저녁을 갈아입는다. 씻기 전에 호주머니가 습관적으로 바지 밖으로 속을 내밀었다. 지갑과 열쇠고리, 몇 장의 영수증, 동전들이 책상 위로 딸려 나왔다. 하루가 내게 거슬러 준 것들이다. 접힌 영수증 사이로 숫자들이 읽힌다. 계산이 정확한 이 조합은 언젠가 나의 일생을 마지막으로 정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던가. 사람을 만나 곁에 있기만 해도 수식이 성립된다. 어떻게 더해지고 있는지, 또 무엇으로 나눠지고 있는지 되짚어볼수록 밑줄이 생겨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막막하게 들여다보는 기분.

 

그런 게 아니지, 삶은 어딘가로 나를 유배시키려고 나를 이 저녁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동전을 주섬주섬 주워 책상 구석 저금통 속에 하나씩 넣는다. 딸각 딸각 저들끼리 부딪치는 쇳소리. 저금통이 그 소리들을 모아왔다. 그랬다. 나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버스로 향했던 바다였다. 오후 내내 백사장을 걷다가 어느 계단에 앉았다. 양손이 접은 무릎을 감고 있었다. 턱을 그 위에 올려놓고 파도와 눈높이 맞췄던 그날. 저금통 안은 마치 이역의 인연을 끌어온 듯 한 닢 한 닢 낯선 지문들로 북적인다. 나 또한 이 시공간에서 잠시 짤랑이고 있겠구나 싶은.

 

남은 동전을 마저 홈에 밀어 넣는다. 저녁놀이 천천히 수평선 너머로 투입된다. 어느 바다보다 서해에게 끌리는 이유는 일몰에서 피를 느끼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때로는 일생동안 제 안의 피를 지피는 것이므로. 그러나 황혼을 들여다보며 그때 할 수 있는 건 고작 막차 시간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감정은 흘리는 것보다 채우는 편이 더 무던했던가. 꽃과 나무가 사계절에게 그토록 타이른 것은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는 훗날의 꽃이나 열매가 속하고자 했던 색을 결코 잊지 않는다. 꽃들마다 내면에서 길어 올린 흔적이 있다. 모 월 모 일 몇 시 몇 초까지 데이터화된 내가 거대한 전산망에 기입되고 있듯.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각기 하나의 바코드가 되어간다. 스러져가는 볕에 읽히는 표정처럼 한 이 그렇게 입력된다. 붉은 해를 검은 점으로 바꾸는 망막의 시신경이 여태 추억에 떠돌다 표류해온다. 그래서 해변의 포말은 바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어루만짐이다. 망망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대기의 마지막 속삭임이다. 서해는 수많은 저녁해가 채워진 홈통만 같아, 그곳에 가서 우는 사람은 조용히 제 안의 열로 끓어 넘치는 자다. 불티가 날리고 연기가 자욱한 그 안에서 제 수심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샤워기에서 연신 쏟아지는 물줄기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다.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 씻는 행위는 마치 하나의 제의(祭儀) 같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경건하게 수챗구멍으로 엉키다 빠져나간다. 기억은 대체로 슬픔을 매개로 저장되는 속성을 지녔다. 서해 바닷가에 가면 그날의 풍경이 중첩되어 아뜩해지곤 한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저녁해를 오래 바라보면 눈 한가운데 검은 점이 생기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각오가 있다는 것. 그 안에는 수없이 피고 지는 마음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비우는 것은 제 영토가 붉게 타들어가는 풍경을 맨눈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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