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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져 덜 답답했으면 하고, 디자인도 그럴싸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도착한 청바지. 입어보니 마음에 든다고 해서 몸에 맞는 것은 아니구나. 치수가 맞을 거라 짐작했는데, 몸을 청바지 치수에 맞춰야 했다. 지금껏 입어 온 청바지는 내 몸에 겨워 하나같이 늘어난 것이라니. 반품을 하고 한 치수 큰 걸로 바꿀까 싶다가도 그 갑갑함이 몸에게 건네는 메시지 같아, 허리에 손이 간다.
한때, 내게 맞지 않는 눈치를 입고 자신감도 빠져서 희멀건 바랜 채 지낸 적 있다. 그때 알았다. 월급쟁이란 청바지 밑단에 삐져나온 실밥처럼 조직에서 사소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오로지 청바지, 그것이 나에게 맞는 차림이었고 나를 인정하는 소탈한 방식이었다. 그 뒤로는 양복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
이웃 나라에서는 청바지가 제국주의 상징이라 입지 못하게 한다던데, 내 몸은 치수를 침략 중인가. 이런 생각이 조여오는 벨트를 만지작거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청바지를 입고 별별 일을 다 했던 것 같다. 가장 먼 일은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 휘청거린 것이었고, 가장 가까운 일은 못에 걸려 천이 찢기고 쓸린 살갗이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나도 허리춤을 추스르게 된다. 핏이란 결국, 청바지를 언제 샀느냐보다 그 사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린 것. 꽉 조여오는 걸 몸이 버티던가 아니면 몸이 줄여가던가. 이 봄날 지퍼를 쓱쓱쓱, 올려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