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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끝이 그렇게 지나간다.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일도. 계절은 뚜렷한 이슈 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을 따라 어느 날은 버려지고 어느 날은 젖는다. 예상했던 대로 예상 밖의 가치로. 모든 시간이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끝이 나 있듯. 과거가 여전히 압박하는 현재에, 미래를 가장한 말들이 결판이란 허울에 붙들려 있듯.
쭉 이어지던 어떤 결심은, 어느 날 무심결에 그치기도 한다. 부질없이 뜨겁게 쏟아냈던 생각이 서서히 말라붙는 것처럼. 커피 머신에 물을 붓고 반나절이 지난 것처럼. 그렇게 남는 것은 쓴맛이 아니라, 어쩌다 눈에 들어온 가게 앞 꽃 화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의 멈춤.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는 예기치 못한 날이 오고 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끝은 끝내 온다. 설명도 생략도 없이. 터널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은, 끝자락의 눈부신 빛이 아니라 불현듯 지나친 사람. 여름을 견디던 사람은 여름 같은 사람이 되고, 봄을 넘긴 사람은 봄 같은 눈매를 갖게 된다. 계절감이 사람에게 스민다. 사람은 그렇게 다음 계절을 품은 채 다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마치 그래야 끝이, 끝이 아닌 것처럼.
나무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잎을 틔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해 조금씩 다른 수형으로 그늘을 넓혀 간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전개. 그렇게 조금씩 다르게, 비슷하게, 결국은 있는 듯 있게 되는 일들. 사라진다는 건 그렇게 아련히 지나간다는 것이 아닐까. 그건 지극히 내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 끝났다는 말 대신, 지났다는 말. 끝이 지워버리는 말.
가끔 내가 나를 오래 데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를 오래 붙잡으려 한 무언가에 길들여 있던 건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나는 그렇게 다른 하나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에 붙들리고. 떠난 날씨의 감정을 읽고, 남은 기억의 온기를 떠올린다. 그 과정은 정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때로는 시적으로 순서가 바뀌고, 끝이 먼저 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정말 어떻게든 살아지기도 한다. 오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떻게든, 그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