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워서 무던해진다. 이 여름에는 웬만한 일은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게 된다. 어지간하게 혹은 수더분하게. 개는 짖고 주인은 나몰라라 해도, 식당 옆자리에서 선풍기를 독점해도, 문득 내가 잊혀진 듯해도, 그저 땀이 밴 이마를 손수건으로 쓰윽 훔치면서, 괜찮다, 무던하게 여긴다. 더위 탓이다. 아무래도 더위 탓이다. 소음도, 기분도, 오해도, 오지랖도.
그러면서 처음엔 불쾌하다가 다음엔 짜증스럽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견디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무던하다는 것은 일종의 생활의 기술이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삶을 견디는 기술이란 처음부터 능숙할 수는 없어 끊임없이 찾아오는 난관을 맞닥뜨리며 익혀가는 것이므로. 한때는 덥고 힘겨웠던 날들이 이제는 견딜 만해졌다는 사실이, 조금은 생경하고 또 조금은 쓸쓸하다.
무더위는 나를 어떤 사이에 두는 것 같다. 이도 저도 아니게, 기억과 망각의 어느 지점, 관심과 무관심의 어느 지점에 그저 멍하니 서 있도록. 처음엔 그 무기력한 상황이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 서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무던해진다는 건 나를 슬며시 배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꼭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고, 꼭 내 뜻대로 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날엔 오히려 나를 조금쯤 실망시켜도 괜찮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가령 평소 같으면 상대에게 예민하게 반응할 일에 무심해지거나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면 상대에 대한 약간의 무례, 약간의 게으름, 약간의 엉망진창이겠지만. 그러니 무더위에 손수건이 흠뻑 젖어도 나쁘지 않다. 접은 면을 펴서 다른 면에 닦고 또 닦으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젖은 김에 콸콸, 세수로 씻겨내는 일들.
그렇게 무던함은 느슨하게 세상과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남의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소소한 욕심이나 작고 치사한 마음을 빵빠레 아이스크림처럼 천천히 혀로 녹여보는 것. 오히려 아주 작은 악덕과 가벼운 위선이 이 여름엔 잘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무기력하게 보이는 얼굴 뒤로 어딘가 살짝 비뚤어진 속내 하나쯤 품어도, 그것조차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는 것. 여름은 사람을 이토록 더위를 먹게 만드는 계절이니까. 의뭉스런 사람보다 속이 보이는 사람이 더 덜 지치니까.
부디, 이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무던해지기를. 그러나 그 무던함이 단지 무기력이 아니기를. 사람에 대해, 감정에 대해, 계절에 대해. 그 무던함이 지나고 나면, 무던하지 않은 무언가가 온다는 걸. 아주 작고도 기분 좋은 배신이 다가온다는 걸.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조금은 엉뚱하고, 조금은 망가진 채로 자신과 마주치기를. 더위 탓이다. 아무래도 더위 덕분이다 라고, 웃어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