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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서점에서 책을 펼치니 그 페이지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 밑줄을 따라 읽다 보면 다른 이의 독해가 내게 묻어나온다. 책을 덮을 때쯤, 나를 지나간 타인의 밑줄로 완성되는 게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통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내가 보인다.
그런 마음은 내가 모르는 무의식에서 자주 의논하고 결론을 내린다. 마음의 안쪽은 통로가 아니라 복제실에 가깝다. 기억이 가공되고, 욕망이 덧칠되며, 불가능한 것들만 선별되어 놓여 있다. 그곳에 감정이 오래 머무르면 마침내 나조차 나를 오역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고백하려다 하지 못한 말. 말해버렸다면 단지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었을 무언가가, 말해지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유예되고 있다. 그 유예 속에서, 나는 내 선택의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되돌아가야 한다는 심정으로.
그러니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보다, 무엇을 잊지 않으려 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닿지 않은 채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