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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검은 데다가 위에 손잡이까지 달려 있는 걸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여기다 얼음을 넣어야겠다, 커피를 녹차를 보리차를 꽉 채워 보는 상상. 대개 대형마트에 가서 둘러보는 일은, 마주친 상품과 한동안 살아보는 것. 상품이 나를 사용하면서 얼마나 만족할까. 이럴 땐 내가 밉겠지, 저럴 땐 내가 필요 없어질 거야. 그래서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살 걸 정하지 않고 둘러보는 일. 그건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같아서.
기어이 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얼음이 들어 있는 빅사이즈 컵을 사다 그대로 쏙 빼내 텀블러 안에 넣고, 갓 내린 뜨겁고 진한 커피를 조심스레 붓는다. 얼음이 틈을 내주는 소리, 그건 마치 늦게 간 영화관 좌석 F열 한가운데로 갈 때, 우르르 일어서 통로를 터주는 사람들 같다. 내가 그리 뜨겁나, 내가 그리 빅사이즈인가, 내가 그리... 텀블러에 애착이 있다니. 백팩에 텀블러를 넣고 뙤약볕 아래 걷다 보면 왠지 든든하다 못해 갈증이 믿음직스럽다. 거 봐라, 나무 아래 그늘은 아이스아메리카노요, 달려오는 전철은 원두가 한가득 갈리는 진동이다.
모쪼록 기어이 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운동하러 갔다 검은 텀블러를 흔들며 건물 뒤편 좁은 길을 빠져나오다 보니, 스치던 자동차가 서행하면서 좀 더 비껴 간다. 검은색 티와 반바지에 검은 팔 토시, 흉기를 들고 있는 듯 보일까. 검은 벽돌로 앞 유리 깨고 사이드 미러 부러뜨리며 나와, 나오란 말이야, 이런 영화 장면이. 탈수 직전까지 갔다가 한 손에 쥔 채 벌컥대는 그 본능을, 텀블러는 알고 있는 건지. 흔들어보면 얼음만 남아 부딪는 소리, 자존심이 다 소진되면 악다구니만 남아 내 안이 소란스러운,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