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텀블러

2025.07.23 14:25

윤성택 조회 수:36


.

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검은 데다가 위에 손잡이까지 달려 있는 걸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여기다 얼음을 넣어야겠다, 커피를 녹차를 보리차를 꽉 채워 보는 상상. 대개 대형마트에 가서 둘러보는 일은, 마주친 상품과 한동안 살아보는 것. 상품이 나를 사용하면서 얼마나 만족할까. 이럴 땐 내가 밉겠지, 저럴 땐 내가 필요 없어질 거야. 그래서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살 걸 정하지 않고 둘러보는 일. 그건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같아서.

 

기어이 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얼음이 들어 있는 빅사이즈 컵을 사다 그대로 쏙 빼내 텀블러 안에 넣고, 갓 내린 뜨겁고 진한 커피를 조심스레 붓는다. 얼음이 틈을 내주는 소리, 그건 마치 늦게 간 영화관 좌석 F열 한가운데로 갈 때, 우르르 일어서 통로를 터주는 사람들 같다. 내가 그리 뜨겁나, 내가 그리 빅사이즈인가, 내가 그리... 텀블러에 애착이 있다니. 백팩에 텀블러를 넣고 뙤약볕 아래 걷다 보면 왠지 든든하다 못해 갈증이 믿음직스럽다. 거 봐라, 나무 아래 그늘은 아이스아메리카노요, 달려오는 전철은 원두가 한가득 갈리는 진동이다.


모쪼록 기어이 아주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운동하러 갔다 검은 텀블러를 흔들며 건물 뒤편 좁은 길을 빠져나오다 보니, 스치던 자동차가 서행하면서 좀 더 비껴 간다. 검은색 티와 반바지에 검은 팔 토시, 흉기를 들고 있는 듯 보일까. 검은 벽돌로 앞 유리 깨고 사이드 미러 부러뜨리며 나와, 나오란 말이야, 이런 영화 장면이. 탈수 직전까지 갔다가 한 손에 쥔 채 벌컥대는 그 본능을, 텀블러는 알고 있는 건지. 흔들어보면 얼음만 남아 부딪는 소리, 자존심이 다 소진되면 악다구니만 남아 내 안이 소란스러운,

 

텀블러를 가지게 되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74 혹시 2025.08.27 12
173 진심의 구조 2025.08.20 28
172 완전히 젖지도, 마르지도 못한 채 2025.08.13 42
171 Zorgartneseca (조르가르트니세캬) 2025.08.06 34
170 핑, 2025.07.30 39
» 텀블러 2025.07.23 36
168 젖은 우산은 세 번 털어야 한다 2025.07.16 47
167 상상 2025.07.09 43
166 무더워서 무던하다 2025.07.02 40
165 시간차 2025.06.25 52
164 마음의 안쪽은 어디로 통하는가 2025.06.18 56
163 그늘 2025.06.11 47
162 어떻게든 그날은 온다 2025.05.28 325
161 흥얼거린다는 건 2025.05.21 324
160 단추 2025.05.14 317
159 신발만 담아 주세요 2025.05.07 333
158 새로 산 청바지 2025.04.30 318
157 봄과 여름 사이 2025.04.23 320
156 하늘이 파래서 2025.04.16 321
155 마음에도 관세가 있을까 2025.04.09 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