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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2025.07.09 14:45

윤성택 조회 수: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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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의자에 기대 벽을 바라보다가, 벽지 패턴에서 시선이 사라지는 걸 느끼곤 한다. 상상은 현실 너머의 것이므로. 그곳은 일종의 도피에 가깝지만, 도피라기엔 너무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이내 돌아오기를 망설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니 상상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지막 방이다. 그 방에서 나는 원하는 모든 것과 만나고 원하는 모든 이와 말을 섞는다. 그 방 안에서는 모든 사랑이 무해하고 모든 슬픔이 따뜻하다.

 

말하자면, 상상은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의 몸이다.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의 한 생이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도시를 수없이 다녀온 것처럼 기억해 내고, 본 적 없는 얼굴의 뺨을 어루만지듯 그리워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찾아 한참 동안 눈동자가 흘러간다. 그리고 종종, 그것이 상상임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오히려 '진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막 도착한 지하철을 서둘러 타고, 환승할 노선의 계단이 제일 가까운 쪽으로 객차 안을 걸었다. 그러니까 지하철이 달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때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 다리에 힘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한산한 좌석에 앉은 어르신들을 스친다. 그때 본다. 얼굴, 젊었을 무렵은 어땠을까. 놀라워라, 그 순간 주름이 사라져가는 이목구비가 보인다. 상상에서 이들의 청춘이 보인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수 조명이, 한 장의 사진을 복원하듯.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과거를 지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내 얼굴을 스쳐 간다.

 

상상이 힘을 가졌다면 현실은 그 힘을 비축하는 곳일까. 아니면, 그 힘이 새어나가는 틈이 현실일까. 에어컨 앞에서 찬바람을 쐬는 것처럼, 상상이 나를 식힌다. 너무나 더운 날들을 지나고 있다. 너무나 애썼던 날들이 상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상상이 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간신히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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