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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雨中) 복제

2025.09.17 14:21

윤성택 조회 수:1

·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신호등은 빨간불,

가방이 젖지 않게 받쳐 들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는데

밖으로 내놓은 매장 스피커에서

빗소리와 섞이는 음악

 

음향 파동일 뿐인 선율이 어느 먼

순수했던 날을 불러온다

신기하기도 하지,

음악이 감정을 복제할 수 있다는 거

옛일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거

 

아스팔트 바닥에서 세차게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활짝 개화할 수 있듯

내 것이었던 기억이 길거리 스피커에서 재생된다는 게

왠지 기묘하다

 

그 시절 나는 누구였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빗소리에서 부지불식간 떠오른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 호르몬의 화학 반응이라면

이 비는 9월이 나에 대해 쓰고 있는 편지다

 

듣고 있는데 음악은 다음 소절에 먼저 가서

내 기분을 터간다

그 둑이 무너지면 눈물이 나는가

 

어느 날, 이 곡을 틀어놓고 다 들으면

다시 되감아서 틀기를 계속했으니

썼다 지우다 찢고 다시 적어갔던 날들

 

신호등을 건너갔다 건너오는 날들은 또 얼마나

음악이 될 수 있는지

 

투명한 비닐 우산에서 굴러내리는 물방울로

흩어졌던 게

그때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행간만 같다

 

빗물은 발목까지 적시고

음악은 내 몫까지 젖어 들고

 

다음번 우연에서 마주치길

서로를 몰랐던 음향 파동이 되길

 

횡단보도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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