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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신호등은 빨간불,
가방이 젖지 않게 받쳐 들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는데
밖으로 내놓은 매장 스피커에서
빗소리와 섞이는 음악
음향 파동일 뿐인 선율이 어느 먼
순수했던 날을 불러온다
신기하기도 하지,
음악이 감정을 복제할 수 있다는 거
옛일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거
아스팔트 바닥에서 세차게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활짝 개화할 수 있듯
내 것이었던 기억이 길거리 스피커에서 재생된다는 게
왠지 기묘하다
그 시절 나는 누구였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빗소리에서 부지불식간 떠오른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 호르몬의 화학 반응이라면
이 비는 9월이 나에 대해 쓰고 있는 편지다
듣고 있는데 음악은 다음 소절에 먼저 가서
내 기분을 터간다
그 둑이 무너지면 눈물이 나는가
어느 날, 이 곡을 틀어놓고 다 들으면
다시 되감아서 틀기를 계속했으니
썼다 지우다 찢고 다시 적어갔던 날들
신호등을 건너갔다 건너오는 날들은 또 얼마나
음악이 될 수 있는지
투명한 비닐 우산에서 굴러내리는 물방울로
흩어졌던 게
그때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행간만 같다
빗물은 발목까지 적시고
음악은 내 몫까지 젖어 들고
다음번 우연에서 마주치길
서로를 몰랐던 음향 파동이 되길
횡단보도를 건넌다